
장재형 목사의 메시지는 마가복음 14장 32-42절의 겟세마네 장면을 사순절의 관점에서 다시 읽으며, ‘아바 아버지’라는 신뢰의 호칭, 깨어 기도하라는 제자도의 요청, 십자가로 향한 고독한 순종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사순절은 늘 우리를 신앙의 더 깊은 층위로 이끈다. 장재형 목사는 겟세마네를 예수님의 마지막 밤이 아니라, 믿음과 순종이 어떤 압력 속에서 실제로 형성되는 장소로 바라본다. 그곳은 감정이 사라진 결의가 아니라, 통곡과 번민이 통과된 사랑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는 신앙의 시험장이었다.
흥미롭게도 요한복음에는 겟세마네의 기도 장면이 서술적으로 반복되지 않는다. 요한은 예수님의 고별설교와 중보기도를 강조하며,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의 주도권과 왕적 위엄을 드러낸다(요 12:27). 반면 마가복음은 예수의 내면이 실제로 흔들리고, 기도로 다시 세워지는 과정을 숨기지 않는다. 장 목사가 마가복음을 택한 이유는 바로 이 인간적 떨림 속에서 이루어진 순종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겟세마네’는 ‘기름 짜는 곳’이라는 뜻처럼, 예수님의 사랑이 압착되는 자리였다. 왕적 영광이 아니라, 십자가라는 낮아짐 속에서 사랑이 정제되는 과정이 펼쳐진다. 그날은 유월절이었고, 예루살렘은 희생제물과 군중의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십자가 사건은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라, 역사와 정치, 종교가 한 점에서 교차한 현실 속 사건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긴박함을 감지하지 못하고 찬송을 부르며 감람산으로 향한다. 장 목사는 이를 현실 감각을 잃은 신앙의 모습으로 해석한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고난의 무게를 감당할 준비 없는 신앙의 민낯이다.
예수님은 세 제자를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가며 “깨어 있으라”고 요청한다. 이는 단순한 경계 명령이 아니라 관계의 마지막 초청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결국 잠들고, 예수님은 그 고독을 홀로 감당한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씀은 인간의 한계를 정확히 진단한다. 그래서 신앙은 결심보다 기도라는 훈련이 필요하다.
겟세마네 기도의 정점은 “아바, 아버지”라는 호칭이다. 이는 감정적 친밀함을 넘어 경외 속에서 드러나는 신뢰의 고백이다. 예수님은 “이 잔을 옮겨 달라”고 요청하지만, 회피로 끝나지 않고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내어놓는다. 순종은 감정의 삭제가 아니라 관계를 향한 선택임을 드러낸다.
이 기도는 단순히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버림받음, 배신, 단절의 공포를 향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조차 관계의 끈—‘아버지’라는 확신—은 끊어지지 않았다. 반대로 제자들의 잠은 신앙의 마비를 상징한다. 시험은 어떤 죄악의 유혹보다 먼저, 현실을 회피하고자 하는 영혼의 무감각으로 찾아온다.
장 목사는 그리스도와의 동행을 “같은 공간이 아니라, 같은 고통과 관심을 나누는 깨어 있음”이라 정의한다. 제자들은 같은 동산에 있었지만, 같은 밤을 살지 않았다. 이 간격이 예수님의 고독을 더 깊게 만든다. 십자가는 사람들이 함께 든 무게가 아니라, 우리가 잠든 사이 예수께서 홀로 감당하신 사랑의 짐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우리를 체념으로 몰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는 우리가 깨어 함께해야 한다”는 부름이 된다. 사순절은 지나간 사건을 회상하는 시기가 아니라, 오늘의 선택 속에서 ‘내 뜻이 아닌 당신의 뜻’을 실천하는 시간이다. 가정, 직장, 관계, 용서의 현장에서 겟세마네의 기도는 일상의 문장으로 번역된다.
믿음은 강한 표정이 아니라 떨림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기도로 증명된다. 고통을 피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사랑을 신뢰하는 고백이 십자가로 이어진다. 그 길 끝에서 우리는 부활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 부활의 빛은, 겟세마네의 어두움을 함께 깨어 통과한 자에게 더 선명히 비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