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믿음의 길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밤의 정경을 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31절부터 38절까지는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인한 십자가의 죽음이 본격적으로 다가오는 긴박한 상황이 배경이 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장면은, 예수님의 죽음이 돌이킬 수 없는 사실로 결정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으셨던 말씀들을 전해주십니다. 그 말씀들 중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이“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요13:31)라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이 시작되는 이 무겁고도 두려운 자리에 “영광”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선포될 수 있는가에 깊이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인간적으로 볼 때 철저한 패배와 절망으로 보입니다. 죽음 앞에서 모두가 떨고 공포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죽음이라는 현실은 그 어떤 인간의 지혜나 재력으로도 극복하기 어려운 최후의 장벽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두고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 헛된 죽음이나 무의미한 희생으로 끝나는 길이 아니라, 영광의 길이며 승리의 길임을 믿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있을 수 없고, 부활 없이 십자가도 완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결국 십자가에서 시작됩니다. 요한복음 13장 후반부에 기록된 유다의 배반은 십자가의 시작이요, 19장 30절에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다 이루었다”는 선언이 십자가의 완성이자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가 임박했을 때부터 이미 흔들림 없이, 그리고 한 치의 후퇴도 없이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예수님의 이러한 흔들림 없는 모습이 바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상황이나 환경에 굴복하지 않는, 절대적인 신뢰와 순종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눈에 죽음은 패배이지만, 예수님께는 십자가가 곧 영광이요 승리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십자가 너머에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역사를 보셨고, 그것을 흔들림 없이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십자가는 모욕적인 죽음이자 실패의 상징이지만,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다”고 선포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믿음이 보여주는 깊은 신비입니다.
실제로 복음서들을 통해 살펴보면, 예수님은 가르침 하나하나와 모든 행보 가운데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신 이 길, 곧 십자가의 길이 영광의 길이다”라는 확신으로 가득 차 계셨습니다. 따라서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불순종의 역사와 순종의 역사’가 극명하게 대비되듯이, 예수님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시작된 죄와 죽음의 역사를 거꾸러뜨리고자 완전한 순종의 길을 가셨습니다. 믿음과 순종을 통해 죽음을 넘어서 부활의 새 생명으로 이어지는 길을 여셨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가 예수님의 길을 참으로 따라가려면, 먼저 십자가라는 현실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이 십자가는 단지 예수님 혼자만 지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또한 뒤따라야 할 길이라는 것이 요한복음 13장~17장의 주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내가 가는 길을 너희도 알리라”고 하셨고, “너희도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제자들에게 그 믿음이 아직 온전히 세워지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베드로는 주님을 지키겠노라, 죽음까지도 함께 가겠노라 호언장담했지만, 정작 예수님이 체포되시던 날 밤에 그 결의가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대제사장의 뜰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13:38)고 예언하신 대로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무너진 것은 베드로만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 또한 두려움에 휩싸여 흩어졌습니다.
이는 인간적인 용기나 결의만으로는 십자가라는 고난의 자리를 끝까지 지킬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십자가는 내 뜻이나 내 힘으로 질 수 있는 짐이 아니라, 믿음과 성령의 능력으로만 질 수 있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 이 사실을 깊이 아셨기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고, 오직 아버지의 뜻에 절대 순종함으로 죽음의 길을 이겨내셨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어서, 복음이란 결국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사랑을 믿고 따르는 것이라고 정리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도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곧 이루어질 것이며 그 뜻이 승리로 귀결된다는 사실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요13:32)라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곧 주시리라’는 것은 십자가 후에 부활의 영광이 임할 것을 바라보는 분명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곧 이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별을 알리십니다.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요13:33)라는 말로,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려주십니다. 인간적으로는 매우 슬프고 가슴 아픈 순간입니다.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은 두려움이자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도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 곧 ‘새 계명’을 주십니다. 이 새 계명의 핵심은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31절 이하가 보여주는 광경은, 십자가라는 극단적인 고난 앞에서도 확신에 찬 예수님의 모습과, 그 길을 아직 깨닫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제자들의 대조입니다. 분명 제자들은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십자가의 길이 어떤 의미인지 미처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요13:36)라고 묻는 장면은 이를 잘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요13:36)라고 대답하십니다. 즉, 지금은 이해도 부족하고 믿음도 연약하지만, 언젠가는 참된 믿음 안에서 예수님의 길에 동참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베드로는 그 순간조차 “주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며 용기를 드러냈지만, 예수님은 그런 인간적 결의로는 불가능함을 지적하십니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13:38)는 말씀은, 십자가라는 길이 신앙의 본질적 심지를 갖추지 않으면 아무리 결의가 대단해도 무너진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결국 십자가를 지는 것은 온전히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진리, 이것이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핵심 메시지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후에 부활의 영광을 확실하게 믿으셨기에, 고난과 죽음 앞에서도 담대히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길도 그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람의 눈에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를 ‘영광’으로 믿고 걸어가는 길입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롬5:8) 구원이 임했음을 안다면, 십자가는 결코 패배가 아니라 오히려 승리의 표지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요19:30)고 선포하실 때까지, 아무런 흔들림 없이 걸어가신 이 길은 곧 ‘십자가와 부활’이 결합된 믿음의 길이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우리 개인의 삶에 적용할 때, 우리가 지금 당장 겪고 있는 고난이나 곤고함, 또는 절망감 속에서도 부활의 영광을 미리 바라보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라”(롬12:12)라고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소망이 확실하면 어떤 어려움도 뚫고 나갈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 소망은 우리가 ‘이미’ 승리를 약속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전한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기로 마음먹는 순간, 그리스도의 승리가 이미 우리에게 전이(轉移)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으니, 나도 내 인생에 주어진 작은 십자가를 붙들겠다. 내 것이 아닌 예수님의 것을 의지하겠다”라는 고백이야말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진정한 믿음의 자세가 됩니다.
물론, 이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베드로처럼 넘어지고 부인하게 될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말씀하셨듯, 진정한 회개와 성령의 도우심을 구할 때, 언젠가는 우리도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갈 수 있게 됩니다. 사도행전 이후 베드로가 보인 변화가 이를 잘 증명합니다. 그는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뒤 성령을 받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십자가는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며, 패배가 아니라 참된 영광으로 향하는 관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바로 우리가 붙들어야 할 본질이라는 것이, 장재형 목사가 누차 강조하는 포인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는 이 문장이 가지는 무게는 그래서 더욱더 큽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그 혹독한 고통의 시간을 앞두고도 예수님은 부활과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보셨고, 결코 뒤로 물러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이 믿음을 닮아갈 때, 삶의 여러 상황 속에서 같은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세상적으로 패배나 실패처럼 보이는 상황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영광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결국 기대는 대상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이미 부활을 통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의 시선을 이 사실에 고정하라고 가르칩니다. 곧, “십자가가 눈앞에 다가왔을 때에도, 오히려 부활의 영광을 보는 믿음을 붙드십시오”라는 가르침입니다.
이처럼 소주제 1에서는 요한복음 13장 31절 이하에 담긴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토대로,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그 길을 걷는 믿음의 본질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계속해서 소주제 2로 넘어가면,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주신 새 계명에 대한 가르침,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집중적으로 다루게 됩니다.
2. 새 계명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가운데 제자들에게 주신 매우 중요한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기존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었던 여러 율법과 계명, 특히 이웃 사랑의 계명도 이미 있었지만, 예수님은 ‘새 계명’이라는 표현을 쓰십니다.
장재형 목사는 “왜 예수님은 이미 율법에 존재하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19:18)라는 말을 다시금 ‘새 계명’이라고 선포하셨을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 답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라는 문구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사랑의 계명은 단순히 문자로만 존재하는 구약의 율법적 ‘명령’을 넘어섭니다. 예수님 자신의 삶, 곧 희생과 대속, 용서로 구체화된 사랑이 기준이 됩니다.
구약 시대에도 분명 ‘사랑하라’는 계명이 있었지만, 유대인들은 그것을 문자로만 해석하거나 제한적으로 적용하며 살았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성을 꿰뚫어 보시면서, 구약의 사랑 계명이 단순히 ‘글자’에 머물러서는 생명이 되지 못함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을 위해, 원수들을 위해, 자신을 배반한 자들을 위해 몸을 내어주시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특히 가늠한 여인을 정죄하려는 이들 앞에서 그 여인을 용서하고 일으켜 세우시는 장면(요8장), 그리고 세리나 창기 등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과 교제하시는 장면 등은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희생적인지 그대로 드러냅니다.
또한 그 정점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으로 오셔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지셨습니다. 이 대속과 희생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신 결정적 사건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라는 한 구절이 결코 추상적이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신 사랑, 곧 죄인을 정죄하지 않고 대신 짐을 지며, 철저히 용서하고 품어주는 사랑이 바로 우리가 따라야 할 ‘새 계명’인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사랑을 제자들에게 계승시키십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교회 공동체가 지켜야 할 가장 본질적이고도 대표적인 표지가 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는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분명히 밝혀줍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말씀을 해석하면서, 교회가 타 종교나 단체와 구별될 수 있는 근본적 기준은 ‘사랑’에 있다고 말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단체가 있고, 각 단체마다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크교도는 터번을 두르고, 불교 승려들은 머리를 깎는 식으로 외적인 표지를 통해 소속과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형제를 향한 사랑’으로 드러내라고 명하셨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시절, 로마 제국 아래에서 박해받던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상호 섬김과 사랑은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환난이나 가난 속에서도 서로 돌보고, 자기 재산을 팔아 가난한 형제에게 나누어주는 등의 사랑으로 공동체를 이룬 모습은, 외부 사람들이 “보라, 저들이 서로 사랑함이 어떠한가!”라며 감탄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전도요, 교회의 증거입니다. 사랑의 계명을 실천했을 때, 세상은 비로소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그분이 걸어가신 길이 어떠한 길인지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사랑은 늘 제한되기 마련입니다. 좋아하는 사람, 나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에게는 쉽게 사랑을 베풀 수 있지만, 나에게 해를 끼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또는 부담스러운 사람을 사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자기 자신에게조차 실망과 분노를 느끼는 순간이 많은 인간은, 상대방을 향한 진정한 사랑을 이어가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장재형 목사는 십자가의 영적 의미를 다시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정죄’ 대신 ‘용서’, ‘단절’ 대신 ‘대속’을 실현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가장 극적인 사랑의 표징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즉, 우리 안에 있는 정죄의 마음을 내려놓고, 형제의 죄와 약점을 품으며, 필요한 경우 내가 그 짐을 대신 지겠다는 태도를 가질 때,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랑이 실현될 때,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많은 치유와 변화가 일어납니다. 상처를 받은 사람, 외면받고 살아온 사람, 죄책감에 눌려 있던 사람들이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지면서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바울이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고 권면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서로의 짐을 지는 것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 곧 십자가 사랑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교회가 이 사랑의 계명을 잃어버렸을 때, 세상은 교회를 향해 신뢰를 거두고 비난을 보냅니다. “말로만 사랑을 외칠 뿐, 실제로는 다투고 분열한다”는 평가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의 매우 소중한 순간에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결국 우리가 평생 붙들어야 할 실천 과제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믿음으로 얻어지지만, 구원받은 이들이 교회로 모여 살아갈 때, 세상 속에서 증거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사랑’이라는 표지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 어떤 은사나 지식도 무의미하게 됩니다(고전13장). 사랑이 없이 고백하는 믿음은 공허해지고, 사랑이 없는 제자도는 위선으로 떨어집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선포하신 이유는, 그분이 직접 보여주신 모범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기셨고(요13:1-20), 심지어 자신을 배반할 유다의 발까지도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도 내가 한 것같이 서로 발을 씻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형제의 가장 낮은 곳에 내려가 섬기는 태도,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 방식입니다. 교회 안에서 누군가 가장 낮은 자세로 섬길 때, 그곳에서 예수님의 새 계명이 빛을 발합니다.
그러나 제자들, 특히 베드로는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요13:36)라는 베드로의 질문 안에 담긴 안타까움은, 십자가가 예수님의 사랑 계명의 중심임을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베드로는 인간적인 용기와 결의만을 앞세워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다”고 말했지만, 예수님이 보여주신 ‘섬김과 대속’의 길, 곧 십자가의 길을 알지 못했기에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연약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요13:1).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요13:36)라는 말씀에는 주님의 깊은 신뢰와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 부활 후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돌이켜 회개했고,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교회를 사랑하며, 결국 순교의 길까지 걸어갔습니다. 과거에는 칼을 뽑는 것으로, 혹은 감정적 장담으로 예수님을 지키려 했지만 실패했던 그가, 나중에는 십자가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온전히 순종하게 된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바로 이 과정을 거쳐야 함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완벽한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실수하고, 관계가 깨어지고, 상처를 주고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계속 마음에 새기고 연습해 나갈 때, 그 사랑이 우리의 삶과 공동체에 서서히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핵심은 바로 이 새 계명입니다. 진정한 사랑으로 서로를 대하고, 정죄하기보다 용서하고, 자기 중심적 태도보다 서로에게 헌신하는 태도를 갖출 때, 세상은 비로소 교회가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복음의 증거는 화려한 언변이나 지식으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랑을 실제로 살아내는 교회의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장재형 목사는 마지막으로, 이 새 계명을 지키는 일이 결코 우리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부어지는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기도로 성령의 능력을 구하며,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세상과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랑, 곧 희생적이고 용서하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소주제 1에서 언급한 믿음의 길이, 사실은 ‘사랑의 길’과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죄 사함과 새 생명을 얻었고, 그 감격이 있다면 마땅히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받은 사랑을 나누어 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우리도 그 영광에 참여하게 하는 초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그 길을 이미 가셨으니, 너희도 걱정하지 말고 따라오라고 격려하십니다.
결론적으로, 요한복음 13장 31절부터 38절까지의 말씀은, 죽음이 눈앞에 다가온 위기의 순간에도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다”라고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담대한 믿음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본문을 풀이하면서, “십자가는 두려움과 절망이 아닌 영광과 승리의 길이며, 그 길의 핵심 동력은 사랑이다”라고 강조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은, 예수님처럼 죽음보다 강한 부활의 소망을 품고 십자가를 지되, 동시에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붙들고 실제 생활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죄인들을 위해 용서와 대속의 길을 열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정죄하기보다 용서하고 세워주는 관계 맺음을 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세상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어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다시 그를 찾아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21장) 묻고,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실패와 연약함을 극복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베드로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가 자주 말하듯, “결국은 우리도 은혜 안에서 돌이켜, 예수님의 길을 따르게 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믿음에 굳게 서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죽음과 절망을 영광으로 바꾼 예수님의 위대한 길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보여주신 그 사랑의 모범을 우리 삶 속에서 실제로 구현해 봅시다.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서로에게 십자가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되고, 세상은 그 사랑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엿보게 됩니다.
그 길은 결코 쉽지 않으며, 때로는 쓰디쓴 희생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요13:32)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 뒤에 부활의 영광이 반드시 있다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며 십자가를 뒤따를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영광 가운데 이끄실 것이라는 소망이 분명히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요한복음 13장, 그리고 나아가 복음서 전체가 강조하는 ‘십자가의 길, 사랑의 길’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가르침을 중심으로, 제자도는 단순히 외적인 규율이나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십자가의 정신이 우리 안에 뿌리내려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로 확장되는 것임을 거듭 설파해 왔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제자가 된다면, 결국 우리도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정리해 보면서,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새겨야 할 핵심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당부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남기신 고별의 메시지이며, 그리스도인의 영적 정체성을 가장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구절입니다. 장재형 목사가 자주 언급하듯이, 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표지를 스스로 잃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그 길이 곧 영광의 길이라는 사실을 되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가 보여준 용서와 희생을 따라, 진실로 형제를 사랑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갈 때, 우리의 삶은 세상과 구별되는 진정한 제자의 모습이 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3장이 선포하는 복음의 정수이며, 또한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실천적인 영적 여정의 핵심입니다.
더 나아가 교회 공동체가 이 말씀을 지속적으로 가슴에 품고 실천해나간다면, 가룟 유다와 같은 배신의 어둠이나 베드로의 부인과 같은 실패의 상처도 결국 사랑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베드로를 회복시키셨고, 사랑의 능력이 실패자를 새로운 반석으로 삼으신 예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개인의 삶 속에서도,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갈수록 이러한 기적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 13장 31절 이하를 통해 우리는 크게 두 가지 가르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십자가는 영광이요 승리임을 믿는 것입니다. 세상이 보는 관점과 달리,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둘째, 그 십자가가 보여준 대속과 용서의 사랑을 우리도 본받아 서로에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남기신 ‘새 계명’이며,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자 정체성입니다.
종합하면,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요13:31)라는 말씀이 선포된 직후 곧바로“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는 당부가 나왔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한쪽은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는 절대적 믿음을 보여주고, 다른 한쪽은 그 믿음이 실제로 구현되는 모습으로서의‘형제를 향한 사랑’을 명령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두 가지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야 함을 거듭 말합니다. 믿음이 진실하다면 사랑으로 드러날 것이고, 사랑이 참되려면 십자가의 영광을 믿는 깊은 신앙이 그 근저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말씀을 붙잡고, 십자가와 부활의 믿음을 소유함과 동시에 새 계명의 실천, 곧 서로 사랑하는 행함으로 주님의 제자임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가 속한 교회와 공동체 안에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는 말씀이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부활의 소망을 붙든 이들이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어 갈수록, 세상은 우리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이며, 복음서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일어난 구원 사건과, 그 사건을 통해 배운 사랑의 실천이 어우러질 때, 우리는 진정한 제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리고 이 길 끝에서,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대로, “곧 주시리라”(요13:32) 하신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 모두 이 말씀을 묵상하며, 요한복음 13장 31-38절이 전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삶에서 실천하기를 소망합니다. 장재형 목사가 거듭 일깨워 주는 대로, 십자가와 부활의 믿음 속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결코 구호로 그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선택하고 결단해야 하는 길입니다. 이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분명합니다. 두려움을 뒤로 하고, 인간적인 자랑과 결의를 내려놓고, 온전히 예수님처럼 섬기고 용서하며 사랑의 길을 걸어갑시다. 그러면 우리 안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나아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