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형(올리벳대학교 설립)목사는 로마서 8장 18–27절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겪는 고난이 무의미한 소모가 아니라 장차 드러날 영광으로 나아가게 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강조한다. 그는 소망으로 얻는 구원이 단순한 낙관주의나 자기암시가 아니라, 눈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확실한 약속에 뿌리내린 미래지향적 확신이라고 풀이한다. 그래서 신자는 고난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고난을 새로운 좌표 속에서 읽어내는 사람이다. 현실은 아프지만 결말은 선하다. 이 신뢰가 무너지지 않을 때 인내는 미루는 기술이 아니라 믿음의 근육이 된다.
그는 먼저 시야의 전환을 요구한다. 같은 어려움도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내러티브가 된다. 세상의 고생은 종종 무목적적 반복처럼 느껴지지만, 장재형목사는 신자의 고난을 “약속의 지평 속에서 의미화된 시간”으로 읽는다. 여기서 소망은 결과를 조작하는 주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시작하신 구원의 드라마에 동참하는 태도다. 소망이란 경험되지 않은 것을 미리 누리는 영적 감각이며, 그 감각은 종말론적 확신에서 자란다. 그래서 그는 신자의 인내를 ‘보상이 확정된 기다림’이라고 표현하지만, 그 보상은 거래적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주시는 임재의 영광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렇게 고난과 영광은 서로를 삭제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해석한다. 고난이 영광을 가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광이 고난의 의미를 드러낸다.
로마서 8장의 독특함은 구원이 개인 구원에만 갇히지 않는다는 데 있다. 바울은 피조물이 함께 탄식한다고 말한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탄식을 우주적 회복에 대한 산통으로 해석한다. 탄식은 패배의 신음이 아니라 탄생의 신호다. 인간의 타락이 세계의 질서를 흔들었듯, 하나님의 회복은 인간의 구원에 머물지 않고 세계의 재창조를 향한다. 이런 관점은 신앙을 사적 위로로 축소하지 않는다. 신앙은 창조세계 전체를 품는 공적 상상력이고, 구원은 ‘나의 천국행’이 아니라 ‘우리의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는 공동체적·우주적 사건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윤리도 확장된다. 환경 파괴를 방관하지 않고 피조 세계의 신음에 응답하는 작은 생활의 결단들—낭비를 줄이고, 돌봄을 선택하고, 더불어 사는 생태를 회복하는 실천—은 종말론적 소망의 전조가 된다. 피조물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는 영성은 곧 창조의 자유로 초대하는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행위다.
동시에 바울은 신자들 또한 속으로 탄식한다고 말한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이들이 여전히 탄식한다는 역설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 놓인 우리의 시간을 정직하게 진단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긴장을 도망치지 말고 존중하라고 권한다. 완성의 기쁨을 앞당겨 흉내 내는 영성은 얕다. 성령의 위로를 경험한 사람일수록, 아직 속량되지 않은 몸과 세계의 어긋남을 더 날카롭게 느끼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탄식은 절망이 아니라 방향을 가진 애통이다.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는 말은 단지 개인의 신체 회복을 넘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성숙과 세상의 샬롬을 향한 공동의 기대를 뜻한다. 그래서 기다림은 손 놓음이 아니라 참여다. 기도, 섬김, 증언, 연대가 그 기다림의 언어가 된다.
여기서 장재형목사는 ‘성령의 중보’라는 복음의 핵심을 끌어올린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조차 모를 때가 많다.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시야가 짧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령은 말로 다하지 못하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해 간구하신다. 이 진술은 기도를 유창한 수사나 복잡한 논리의 경쟁에서 해방시킨다. 기도의 힘은 문장력이 아니라 내주하시는 성령의 신실하심에서 나온다. 성령은 우리의 욕망을 교정하고, 우리의 무지를 덮고, 우리의 현실을 하나님의 뜻 속에 다시 배열하신다. 그러니 중보는 고도의 영적 기술이 아니라, 성령의 리듬에 맞추어 호흡하는 삶 자체다. 우리는 침묵으로도 기도할 수 있고, 눈물로도 예배할 수 있다. 성령의 중보가 보장하는 것은 ‘정확한 청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정확한 연결’이다. 연결이 회복되면 삶의 의제도 재배치된다. 원하는 것을 다 얻는 대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더 분명히 사랑하게 된다.
이러한 기도의 실제는 일상에서 검증된다. 경쟁이 일상인 캠퍼스에서 성령의 중보를 믿는 사람은 비교로 흔들리지 않는다.타인의 성취는 나의 실패가 아니며, 실패는 나의 정체성이 아니다. 소망의 사람은 결과로 자신을 정의하지 않는다. 그는 과업을 예배처럼, 관계를 소명처럼 대한다. 그래서 계획표는 팽팽해도 마음은 경직되지 않는다. 시간 관리가 통제의 강박이 아니라 사랑의 순서가 된다. 연구와 과제, 동아리 활동과 아르바이트 같은 수많은 역할의 파편 속에서도, 성령은 우리의 욕구와 두려움을 하나님의 뜻과 접속시키며 정렬해 주신다. 이런 정렬이 일어날 때, 결정을 미루던 우유부단은 사라지고, 서두르던 조급함은 진정된다. 평안은 감정의 온기가 아니라 관계의 질서에서 찾아온다.
장재형목사는 또 하나의 중요한 통찰을 덧붙인다. 고난의 현장에서 신자는 약해지는 대신 더 진실해진다. 고난은 우리의 무능을 폭로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 깊이 맛보게 한다. 믿음은 현실 회피가 아니라 현실 직면의 용기이며, 소망은 무지개가 아니라 언약의 기억이다. 그래서 그는 신자에게 “낙심하지 말라”는 단순한 긍정의 주문 대신, 낙심의 이유를 정면으로 다룬다. 불확실한 미래, 반복되는 실패, 관계의 균열, 건강과 경제의 압박—이 모든 것은 실제다. 하지만 이 실제 위에 더 견고한 실제가 있다.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바울이 “아무것도 우리를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언할 때, 그는 감정을 과장하지 않았다. 십자가와 부활은 사랑이 추상적인 기분이 아니라 역사 속 사건임을 증명했다. 그 사건의 실재가 오늘 우리의 확신이 된다. 확신은 비현실적 자신감이 아니라 복음의 현실감이다.
피조물의 탄식과 성령의 중보를 동시에 듣는 귀는 사회의 아픔에도 민감해진다. 경쟁이 구조가 된 사회에서 탈락한 이들의 신음, 전쟁과 재난 속에서 쏟아지는 무고한 눈물, 차별과 혐오로 눌린 목소리—이 모든 탄식 위로 성령의 탄식이 겹쳐진다. 그 겹침을 듣는 신자는 방관자가 아니라 중보자가 된다. 중보는 멀리서 안부를 묻는 도덕적 제스처가 아니라, 가까이서 상처를 함께 견디는 연대다. 단기간의 성과를 약속하지 않지만, 오래 견디며 잊지 않는 사랑을 실천한다. 교회가 세상의 고통을 자기 일정으로 가져오고, 대학의 그리스도인들이 캠퍼스의 약한 지체들을 우선으로 돌볼 때, 작은 회복이 시작된다. 이 작은 회복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예고하는 사인들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대한 역사의 주인공으로만 부르지 않으신다. 대개는 작은 자리에서 성령과 함께 역사하라고 부르신다. 작은 자리에서의 충성은 큰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다.
‘이미와 아직’의 경계에서 우리는 자주 흔들린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맛보아도, 때로는 기도가 막히고, 말씀은 멀게 느껴지고, 공동체마저 낯설다. 장재형목사는 이때야말로 성령의 중보를 신뢰할 때라고 말한다. 믿음은 감정의 높낮이를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성령은 우리의 감정과 상관없이 일하신다. 우리가 마땅히 빚어내지 못한 탄식을 성령이 우리 안에서 빚어내실 때, 우리의 빈틈은 은혜의 통로가 된다. 그래서 실패의 낮은 골짜기는 사라지지 않지만, 그 골짜기는 더 이상 고립의 장소가 아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낮아지심을 배우는 장소, 서로를 위해 울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는 장소, 사랑의 근육을 단련하는 장소가 된다. 고난은 우리를 파괴하지 못한다. 고난은 사랑을 얕게 만들지 않고, 사랑을 두껍게 만든다.
이 모든 메시지를 엮어 장재형목사는 신자의 일상으로 내려온다. 그는 신앙을 거대한 슬로건 대신 치밀한 습관으로 제시한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성령의 숨결에 맞추는 기도, 피조물의 탄식을 잊지 않게 하는 절제의 생활, 공동체의 약한 지체를 우선에 두는 배려, 결과보다 과정을 경건하게 만드는 성실, 실패에서 배움을 추출해내는 겸손, 복음을 말로만 전하지 않고 삶으로 번역해내는 진정성. 이런 습관들은 과장되지 않아서 더 오래 지속된다. 소망은 크게 외치는 구호보다 작게 반복되는 습관에서 더 잘 자란다. 습관이 시간을 만들고, 시간이 성품을 만들고, 성품이 결국 우리의 이야기를 만든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다음 세대의 소망이 된다.
장재형목사가 전하는 로마서 8장의 복음은 우리에게 두 가지 시선을 동시에 훈련시킨다. 하나는 멀리 보는 시선이다. 새 하늘과 새 땅, 온 피조물이 영광의 자유로 초대될 마지막 날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다른 하나는 가까이 보는 시선이다. 오늘 내 곁의 사람, 내가 공부하는 전공, 내 손에 맡겨진 시간과 재능, 내 도시의 구체적 문제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멀리 보는 시선이 가까움을 왜소하게 만들지 않고, 가까움을 정직하게 사는 태도가 멀리 보는 소망을 흐리게 만들지 않는다. 이 두 시선이 교차할 때, 신앙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이 아니라 현실을 가장 깊이 사랑하는 힘이 된다.
마지막으로 그는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듯 말한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너의 탄식은 허공에 흩어지지 않는다. 성령이 네 안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서, 교회가 역사 곳곳에서 함께 탄식하며 기도한다. 이 거대한 중보의 그물망 속에서 우리는 넘어져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오늘의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황폐한 곳을 향해 작은 회복을 시도하며, 기도의 자리를 떠나지 말자. 소망은 나중에 갖추어지는 결론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습관이다. 그 습관이 우리의 시선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손발을 이웃에게로 파송하고, 우리의 언어를 복음의 어휘로 다시 빚는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안다. 장차 나타날 영광은 무한히 크고, 그 영광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걸음은 오늘도 성령의 중보로 지탱되고 있음을. 그리고 그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정말로 아무것도 없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