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로마서 8장 28절부터 30절까지 말씀은 기독교 교리 안에서도 가장 심오하고 중요한 주제에 속합니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구절을 해석할 때, 무엇보다도 복잡한 신학적 논쟁이나 철학적 해석에만 몰두하기보다는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실제로 이 짧은 구절 속에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섭리’, 그리고 ‘예지와 예정’이라는 거대한 신학적 주제들이 녹아 있습니다. 그로 인해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간에 첨예한 교리적 대립을 일으키기도 했고,역사적으로 숱한 신학자들의 논쟁이 벌어졌으나, 정작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하고자 했던 말은 학문적 논쟁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전하고자 한 것은 당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처절한 고난을 당하던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확실한 구원과 보호의 약속’이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본문 이해의 지향점에 서서, 우리가 먼저 말씀의 본래적 메시지에 초점을 맞춘 뒤 신학적 논의를 수용해야 함을 거듭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먼저 로마서 8장 28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는 구절에서 출발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암송하며 위로받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우리에게 ‘선’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나중에는 악으로 판명될 때도 있고, 반대로 악이나 실패라고 생각했던 일이 훗날 선으로 바뀌어 커다란 유익을 주기도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미래를 알 수 없는 제한적 존재이기에 끊임없이 불안을 느끼고 의심에 사로잡힙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중요한 전제 안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단호하게 선포합니다. 그 말은 우리의 모든 부족함과 연약함을 성령께서 채우시고, 결국은 하나님의 크신 계획 안에‘선’으로 귀결될 수 있도록 섭리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장재형목사 역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부르신 목적과 계획이 분명하기에, 비록 우리가 지금 우리의 한계를 느끼고 좌절하며 넘어지더라도 결국에는 선을 이루신다”라고 설파합니다.
이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란 ‘부름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이고, 그 구성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해서 하나님께 나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고 또 우리 마음을 여셨기에 그분을 사랑할 수 있게 된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예정’과 ‘섭리’를 통해 역사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예정이란 우리의 운명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과 역사까지도 하나님이 이미 아시고 계획하셨고, 그것이 결국 선을 이루도록 이끄심을 믿는 신앙고백”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예지와 예정’의 개념을 들려주는데, ‘예지(豫知)’는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아신 것이요, ‘예정(豫定)’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기로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로마서 8장 29절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예정’의 목적은 단순히 우리의 구원을 결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만들기 위해 미리 정하신 것이라는 점을 바울이 강조합니다. 여기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은 우리가 예수님의 삶과 인격, 그분의 거룩함, 사랑, 순종, 자비 등등을 닮아가도록 목적을 두었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더 큰 목적은 그리스도를‘맏아들’ 삼아, 많은 형제들이 함께 영광에 참여하도록 구원의 큰 그림을 설계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정의 가장 궁극적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님을 닮아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0절을 보면,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이것은 흔히 ‘5중 단계’라고 불리는 구원의 과정입니다. 바울이 제시하는 이 구원의 스텝은 예지, 예정, 부르심(소명), 칭의, 영화입니다. 은혜가 먼저 우리의 마음에 찾아와 우리를 부르셨고, 그 부르심으로 인해 우리가 예수를 믿어 의롭다 함을 받았으며, 결국 최종적으로는 영화의 자리, 즉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선언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정수’이며, 믿는 자들이 흔들리지 않고 확신 가운데 거할 수 있는 근거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내 의지나 능력으로 구원에 이른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예비된 길을 따라 왔고, 앞으로도 그분께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을 보아도, 그는 과거에 지독한 박해자였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투옥하거나 죽이기 위해 바리새파의 열심을 따라 극단적 행보를 보였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거꾸러지고 난 뒤 완전히 회심하여 가장 열정적인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바울이 그런 역사를 만들어낼 거라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역사하신 주님의 섭리는 그가 과거에 지녔던 모든 열심과 지식을 다 뒤집고, 복음 전도의 도구로 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악’이라 여겨졌던 요소나 나의 연약함, 실수까지도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이런 절대 주권을 바탕으로,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그 확신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눈앞의 상황이 아무리 암담해 보이더라도,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예정하셔서 우리를 사랑으로 부르셨다면, 내 인생의 ‘조각난 부분들’마저 모자이크처럼 맞추어 결국 놀라운 작품으로 만드신다”라고 설명합니다.
결국, 예정론이란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고도 사랑해 주셨고, 그 주권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목적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는 선언입니다. 칼빈의 ‘이중 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이 많은 비판을 받고 또 오해를 자초하기도 했지만, 사실 칼빈이 말하고자 했던 핵심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절대적인 주권자이시며, 그 은혜 안에서 ‘선택받은 자’가 얼마나 큰 축복과 확신을 누리는지”를 강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6-17세기 이후에 발전한 이신론(Deism)이나 자연신론(Natural Theology)은 하나님을 ‘우주의 창조자’이되 지금은 개입하지 않는, 멀리 떨어진 존재로 만들어버렸고, 많은 이들이 ‘하나님이 진정 나와 함께하시는가?’라는 의심 속에서 영혼의 불안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칼빈이 “하나님은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도 허락 없이는 불가능하게 하시는 절대 주권자”라고 외쳤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 역시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통치자”이시며 “나의 호흡마저 주관하시는 분”이시라면,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어떤 고난이나 실패조차도 하나님의 섭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섭리의 결론은 우리를 해치거나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닮아가도록 성화시키고 영화에 이르게 하는 방향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 사용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표현도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사랑을 자랑하려고 하지만, 성경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의 부르심 앞에, 죄인 되었던 우리가 응답하여 그분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지(豫知)와 예정(豫定) 안에서 이루어진 영적 신비입니다. 바울처럼 극악무도한 죄인까지도 회심시켜 가장 열정적인 전도자로 만든 이 전적인 은혜는,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도 있고, 들어도 반응하지 않는 이들도 많지만, “나에게 왜 이렇게 복음이 들렸고, 나는 왜 이렇게 예수를 믿는가?” 질문해 보면,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Prevenient Grace) 때문임을 깨닫게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의 구원이 나의 실력이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은혜요, 사랑이므로, 신앙의 사람들은 늘 겸손하되 감사와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지예정’은 그저 어려운 신학 용어가 아니라, 바울과 같은 극적인 체험을 한 자들의 진솔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미리 아시고, 나를 정하시고 부르셨기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는 인식이야말로 구원받은 자가 누리는 참된 평강을 줍니다. 우리는 믿음 생활을 하다가 종종 ‘내가 이렇게 모난 존재인데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려나? 혹은 나를 계속 사랑하시려나?’라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예지와 예정’에 대한 확신은 우리의 불안함을 덜어주고, 마음 깊숙한 곳에 ‘하나님은 이미 나를 아시고도 나를 선택하셨구나’라는 굳건한 위로를 줍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확신을 “성도의 견인(堅忍)”과도 연결지어 설명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한번 붙드신 이상 절대로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책임지시며 영화롭게 하신다는 진리를 믿습니다. 로마서 8장 30절에서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말할 때, 바울은 이미 ‘영화롭게 하셨다’고 과거형으로 표현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부터 끝까지 분명하다는 뜻이며, 그 길에서 후퇴하거나 도중에 버림받는 일이 없음을 확언하는 것입니다. 인간 편에서는 넘어지기도 하고, 때론 죄를 지어 후회하거나 낙담하며 ‘잘못된 길’을 걸을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손길에서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믿을 때, 자기 안에 갇혀 불안해지거나 절망할 이유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31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외칩니다. 앞서 언급된 구원의 과정,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 부르심과 칭의와 영화라는 ‘5중 축복’이 있다면, 그 누구도 그것을 뒤엎거나 무효화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사람이 선포하거나 취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라는 수사의문으로, 그야말로 이 위대한 구원을 누가 감히 반박하거나 없애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는 문장은 구원받은 자가 붙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확신 구절 중 하나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일하시고 나의 편이 되신다면, 이 세상 그 무엇도 나를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간단 명료한 신앙고백이라고 역설합니다. 이 구절은 시편 27편 1절에서 다윗이“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라고 고백했던 믿음과 상통합니다. 또한 시편 62편 1절에서“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라는 고백도 마찬가지 맥락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이 ‘절대적인 보호와 인도’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만을 의지합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의 사랑은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통해 예표되었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완성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독자 이삭을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내어드린 것은 믿음과 순종의 가장 극적인 상징이지만, 사실 그것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셨기에, 죄인 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보혈의 피’로 우리를 사셨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들과 함께 주시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느냐는 것이 바울의 논증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가장 귀한 것을 주셨으니, 다른 필요 역시 결국은 모두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33절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어떤 존재도 믿는 자들을 고소하거나 정죄할 권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고소나 정죄는 궁극적으로 ‘판결권’을 가진 이가 해야 하는데, 우리의 구원을 선포하고 의롭다고 선언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서로를 고발하고 판단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아무런 효력을 갖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 등장하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사람들이 던지려는 돌 앞에 떨고 있었을 때, 예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말씀하시자 모두가 돌을 내려놓고 떠난 사건을 상기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땅히 죄를 심판할 수 있음에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고 선언하셨는데, 죄인에 대한 정죄 권한을 가진 주님께서 그렇게 ‘자비의 은혜’를 베푸셨다면, 누가 감히 죄인을 멸망시키겠느냐는 것이 본문의 메시지와 통합니다.
34절도 같은 맥락을 잇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예수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는데, 그분이 바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주이십니다. 그런데 그 심판자 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변호하시고 중보하신다면, 믿는 자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며 우리를 위해 간구하실 뿐 아니라, 예수님 역시 하늘 보좌에서 끊임없이 중보자와 대제사장 역할을 감당하고 계시니, 우리가 죄 때문에 넘어질 때마다 다시금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덮고도 남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요점은,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절대적 확신’입니다. 35절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반문하는데, 바울은 우리가 세상에서 당할 수 있는 수많은 고난을 열거합니다.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 여기서 말하는 ‘환난(θλῖψις)’은 타작마당에서 곡식을 내리치며 알곡과 겨를 분리하는 것처럼, 심각하게 인간을 압박하고 몰아넣는 극단적 상황을 뜻합니다. ‘곤고(στενοχωρία)’는 마음이 좁아지고 답답해지는 심리적 고통을, ‘박해’는 외부로부터 오는 적대적 공격을, ‘기근’과 ‘적신’은 굶주림과 헐벗음을, ‘위험’과 ‘칼’은 실제 처형이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합니다. 당시 로마의 성도들은 이 모든 상황을 실제로 겪었고, 바울 자신도 수없이 고난을 당했기에, 이 말은 현실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환경조차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구원이 불확실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절대 사랑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재형목사는 “고난이 크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줄어들거나 변질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재차 강조합니다. 오히려 성경은“우리가 주를 위하여 종일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다”(시편 44편 22절 인용)라고 말하면서도, 37절에서는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고 반전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간신히 살아남는다”가 아니라, “넉넉히 이긴다”고 선포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궁극적 승리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미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천국 문을 열어 놓으셨으니,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그 길을 따라 넉넉히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십자가 부활 신앙의 핵심”이라 부릅니다. 세상에서는 환난이 있을지라도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주님이 먼저 세상을 이기셨고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2.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믿음
로마서 8장 38-39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신앙고백을 절정에 이르게 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 구절은 성도들이 가장 사랑하는 말씀 중 하나입니다. 바울은 사망과 생명, 천사들과 권세자들, 현재와 미래, 그리고 어떠한 능력이나 초자연적 존재 등등, 인간이 두려워하거나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총망라하여 말한 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고 선언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에 대해 “구원받은 자가 누리는 최고의 안식과 평강이 어디서 오느냐면, 바로 이 ‘끊을 수 없는 사랑’의 확신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라는 대조는 인간의 모든 가능성과 한계를 아우릅니다. 가장 두려운 일과 가장 좋은 일이 모두 포함되는데, 그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과 사랑을 무효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라고 할 때, 천사나 권세자들이란 영적인 세계와 세속적인 세계에 대한 권세들을 뜻합니다. 바울이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말한“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을 떠올릴 수 있는데, 설령 사단의 세력이 강력하다고 해도, 또는 세상 권력이 얼마나 무시무시하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빼앗아갈 수 없다는 확신을 주고 있습니다.
또한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라 함은 시간의 흐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포괄합니다. 우리가 현재 직면한 고난, 앞으로 당면할 위기나 변화된 상황도 결국 우리가 받은 구원과 사랑을 흔들 수 없습니다.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라는 구절은 인간이 설명할 수 없거나 두려워하는 모든 미지의 영역을 상정합니다. 당시 고대 세계는 별자리나 우주의 질서가 인간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굳게 믿기도 했는데, 바울은 아무리 우주가 광대하고 어떤 수수께끼 같은 힘이 작용하더라도, 그것이 성도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의 확고부동한 사랑을 신뢰하는 것’이요, 이 사랑 위에 굳게 서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향해 갈망하고, 죄를 회개하며 애통할 수도 있지만, 그 모든 과정은 이미 ‘주께서 베푸신 변치 않는 사랑’ 속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이나 주변 환경이 조금 흔들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 자체가 변동되거나 사라지는 법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를 잊고 순간적으로 두려움과 의심에 빠질 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내가 확신하노니”라는 표현으로 단언합니다. 믿음 안에서 사는 자는 확신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확신이란 내 감정이나 기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의 구원을 책임지신 하나님의 주권에 근거한 것이기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이 마무리되는 이 시점에서 바울이 준 메시지는, 로마 교회 성도들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구원받은 자의 길은 세상적으로 볼 때 환난과 곤고와 박해와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이 가득한 길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넉넉히 이기는 길”을 갑니다. 왜냐하면 이 길을 이미 예수께서 걸으시고 부활 승리하셨으며, 그 사랑을 보여주셨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대제사장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갈 때도 하나님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우리를 안위하고, 결국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는 다윗의 고백(시편23편)은, 복음으로 충만해진 신약의 성도들에게 더 확고한 약속이 되어 다가옵니다. 바울은 그래서 이 확고한 약속의 결론을“사망이나 생명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말로 요약한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바울의 선언 속에서, 성도가 가져야 할 두 가지 중심 태도를 이야기합니다. 첫째, 아무도 우리를 끊을 수 없는 사랑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고, 둘째, 이 사랑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이 정말 나 같은 죄인을 아직도 사랑하고 계실까?”라고 의심할 때가 있지만, 로마서 8장 전체가 말하는 바는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결국 영화롭게 하시겠다고 이미 결정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내어주셨고, 성령을 보내어 우리 안에서 간구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낙심과 불안을 불식시키는 진정한 힘은, 이 ‘견고한 사랑과 구원’에 대한 믿음에서 나옵니다.
한편, 우리는 이 구원과 사랑을 오해해서 “나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라는 식의 방종에 빠져선 안 됩니다. 바울은 29절에서 분명히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미리 정하셨다”고 했고, 30절에서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가 지금도 진행 중인 ‘성화의 과정’을 위해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성령의 도움을 구하고, 죄를 멀리하며,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를 닮으려 노력하는 것은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 구원받은 자가 반드시 열매 맺어야 할 열매입니다. 그 길에서 때로는 넘어져도, 궁극적 실패나 버림은 없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견인’이라는 견고한 교리이며, 바울이 8장 마지막에서 찬양으로 선포한 결론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견인의 진리를 붙들 때 우리 안에 자유와 담대함이 살아난다고 말합니다.
성도들은 우리의 믿음을 붙드는 주님이 실수하거나 흔들리는 분이 결코 아니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르신 열두 제자들 가운데는 실수투성이였던 베드로도 있었고, 의심하던 도마도 있었으며, 배신한 가룟 유다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끝까지 품으시고 가르치셨습니다. 물론 가룟 유다는 최후의 배신을 선택했지만, 베드로나 도마 같은 연약한 존재는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이것이 바울이 몸소 체험한 은혜였고, 자신이 기록해 전해준 복음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오늘날 우리가 로마서 8장의 말씀을 통해 새롭게 깨닫고 확인해야 할 핵심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는 이 한 마디 질문은, 믿음을 흔들고 낙심케 만드는 수많은 장애에 대한 결정적인 반문입니다. 로마서는 우리의 구원이 ‘순간적 선택’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부터 장래까지 관통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사랑 안에서 완성되어 가는 것임을 증언합니다. 우리가 교회로 부름받았을 때부터, 회개하고 세례받을 때, 매주 예배에서 말씀을 들으며 성찬에 참여하고, 때로는 회의와 갈등, 슬픔 속에서 눈물을 흘릴 때에도,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나는 너를 부르고, 너를 의롭다 했으며, 너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에게는 현재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그 뒤에 준비된 영광을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열립니다.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의 이 굳건한 사랑이야말로 신자의 궁극적 생명의 근원이고, 동시에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힘”이라고 거듭 상기시킵니다. 로마서 8장의 결론부에서 사도 바울은,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얼마나 특별하고 존귀한 존재인지 말해주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대단한 사랑 안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이야말로 온 우주의 주인이 그 아들을 통해 친히 증명해 보이신 사랑이요, 다시 오실 주께서 끝까지 지켜내실 구원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난이나 위험 속에 있어도, 어떤 시련이나 실패를 겪어도, 결국 우리의 존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자”라는 신분으로 귀결됩니다. 이보다 더 확실하고 영광스러운 메시지가 또 있을까요?
장재형목사는 이런 결론과 함께, 우리가 매일 “하나님, 오늘도 당신의 변함없는 사랑 안에서 걸어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며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환난이 밀려와도, 혹은 내 안에서 무너짐이 발생해도, 여전히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나를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확인은 종종 예배에서, 말씀 묵상에서, 기도 중에 일어납니다. 때론 성찬 예식에서, 예수님의 보혈과 몸을 상징하는 떡과 잔을 받으며 “정말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다 내어주셔서 나를 살리셨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믿음이 다시 한 번 깨어나고, 마음의 문이 열릴 때, 우리는 비로소 ‘넉넉히 이기는 삶’의 기쁨을 조금씩 체험하게 됩니다.
로마서 8장 28-39절은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사랑과 구원의 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지와 예정’의 신비에서 시작하여, ‘고난의 극복’을 넘어, 그 어떤 것이라도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외치면서 장대한 구원의 이야기를 펼쳐 놓았습니다. 장재형목사가 이 본문을 강해하면서 역설하는 핵심은 “우리가 현재 맞닥뜨린 문제와 고민, 죄책감이나 두려움이 아무리 커도, 그 위에 솟아오르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훨씬 더 크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그 은혜의 절대성’이 우리를 붙들어 준다는 메시지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의 죄와 무능력함을 인식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지만, 거기에만 빠져 영적 자학과 침묵에 머문다면 복음의 능력이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핵심은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는 일련의 반문을 통해, 이미 우리에게 승리의 길이 열려 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확신을 붙들고 세상 속에서 견고히 설 때, 성도들은 자기 실수를 이겨내고, 세상의 유혹을 떨쳐내며, 보다 더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알게 됩니다. “참으로 그 어떤 상황도 나를 주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라는 깨달음이야말로, 로마서 8장이 선사하는 궁극의 자유와 평강입니다.
이렇듯 바울은 로마서 8장 후반부를 통하여, 성도가 누려야 할 종말론적 확신과 현재적 담대함을 동시에 안겨줍니다. 우리의 구원은 과거에 계획된 것이고(예지와 예정), 현재에 실현되고 있으며(부르심과 칭의), 장차 완성될 것입니다(영화). 그 가운데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핵심 축입니다.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전적으로 드러났고,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의 강림을 통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으며, 미래의 영원한 천국에서 완전히 실현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이 사랑을 굳게 믿고, 그 사랑이 요구하는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기 위해 언제든 순종하는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두고 “교리적 확신이 삶의 현장에서 구현될 때, 비로소 진정한 신앙이 된다”라고 말합니다. 로마서8장을 연구하고 깊이 묵상하되, 일상에서조차도 불안과 걱정에 쉽게 휩쓸리고 마는 우리의 모습이 있다면, 다시금 이 말씀을 되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선언은, 이제 우리의 삶을 실제로 지탱하는 든든한 초석이 되어야 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는 질문은, 우리가 흔들릴 때마다 다시금 부딪쳐야 할 진리의 언어입니다. 이 질문을 계속 묻는다는 것은, 사실상 “어떤 누구나 어떤 환경도 나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신앙고백을 되풀이하는 것과 같습니다.
로마서 8장 28-39절에 담긴 이 위대한 메시지는, 바울 시대의 박해받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 빛을 잃지 않습니다. 삶이 불확실해 보이고, 순간순간 실패나 좌절을 경험하며, 영적 나태나 죄책감에 빠지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구원의 스토리” 안에 있다는 사실은 결코 흔들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적 증거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값비싼 대가로 우리를 사셨기에, 하나님이 시작하신 구원을 완성하실 수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외치는 바울의 자신감과,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고발하리요?”라는 그의 신앙 선포가, 지금도 우리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감정적 고양이 아니라, 신학적·역사적 근거가 확실한 진리의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늘 이 본문을 설교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증하시는 것이 있다. 바로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과 ‘신실한 구원 완성’이다”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우리가 지치고 상한 심령으로 “정말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라고 절망할 때, 로마서8장을 펼치면,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가 구체적으로 다가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대적하리요?” “누가 끊으리요?”라는 일관된 반문을 들을 때, 우리는 그 어떤 정죄자보다 크신 예수 그리스도, 그 어떤 대적보다 강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그 어떤 끊으려는 세력보다 우월한 성령의 사랑이 함께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그것이 복음이고, 그 복음의 힘으로 우리는 오늘도 일어설 수 있습니다.
바울이 “내가 확신하노니”라고 말했듯이, 우리 역시 “정말 아무것도 나를 주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구나”라는 믿음의 자리에 이르고, 그 믿음에 굳게 서게 될 때, 진정한 평안과 용기를 얻습니다. 이 확신이 있으면, 영적 전투에서 쓰러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고, 유혹에 맞서 승리할 수 있으며, 고난 중에도 소망을 품고 전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의지와, 내가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이 견고한 기반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전해 준 로마서 8장의 위대한 메시지는 결코 옛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새롭게 일으키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하나님의 절대 사랑이 불러일으키는 구원의 드라마”라고 명명하며, 성도들이 그 안에서 두려움 없이 담대히 복음을 살아내기를 권면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미 확보된 것이나, 그것이 우리를 자만이나 태만으로 몰아넣는 교리가 아니라, 오히려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겠다는 결단으로 이끄는 힘이 됩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제시한 ‘예지, 예정, 부르심, 칭의, 영화’의 과정은 철저히 하나님 편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고, 성도의 견인은 실수하고 넘어져도 결국 최종 목표인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영화’에 도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할 일은 그저 믿음 안에서 “주님, 나를 부르셨으니 나를 온전케 하시는 것도 당신의 능력과 은혜에 있음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동시에 ‘사랑의 부르심’에 걸맞게 점점 더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이처럼 로마서 8장 28-39절의 강해는 우리에게 끝없는 소망을 줍니다. 여기에 담긴 진리를 붙잡고, 혹독한 상황에서도 “넉넉히 이긴다”고 선언했던 바울의 믿음을 이어받아, 교회라는 공동체가 굳게 서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이리저리 몰리고 때로는 조롱받고, 성도 개인이 여러 가지 사소한 고민과 큰 시련에 눌릴지라도,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는 물음은 결코 빛을 잃지 않습니다. 세상 역사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무대입니다. 그 무대에서 우리가 보급받는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부활의 능력이며, 바로 그 사랑과 능력 때문에 우리는 그 어떤 칼도, 어떤 박해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을 중단시킬 수 없음을 압니다.
로마서 8장 후반부가 선포하는 최종 결론은 “사랑”입니다. 모든 신학적 탐구나 교리적 논쟁도 여기로 귀결되어야 하고, 이것을 붙들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은 공허해집니다. 구원을 얻었느냐 잃었느냐 하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바울은 “나는 확신한다”라고 말함으로써 논쟁을 뛰어넘어 ‘삶의 자리’에서 이 사랑을 체험해 보라고 독려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힌 바울과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은, 비참한 환경에서도 기쁨과 찬양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생명이나 사망이나 그리스도의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사랑을 붙들 수만 있다면, 세상이 주는 수많은 압박과 회의에도 ‘두려움 없는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마지막으로 “복음은 사람이 만나는 철학적 질문들의 ‘해답’이며,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의 결정체다”라고 가르치면서, 로마서 8장 28-39절이 주는 이 장엄한 선언 위에 우리의 신앙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세상이 흔들려도, 교회가 미약해 보일 때에도, 결국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끝까지 지켜내고, 나아가 예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신다는 사실이 우리의 터전”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한편으로는 경이롭고, 다른 한편으로는 감격스러우며, 동시에 책임을 따르는 소명입니다. 그 사랑을 받은 자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질문은 늘 같습니다. “누가 우리를 끊으리요?” 그리고 이 답은 바울처럼 “어떠한 피조물도 끊을 수 없다”라는 확고한 확신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사실을 마음 깊이 새기고, 매 순간 이 사랑을 신뢰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로마서 8장이 보여 준 복음의 능력을 실제로 경험하고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