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행전 24장은 한 개인의 신앙이 제국의 질서와 마주 설 때 벌어지는 충돌을 무대 위에 올려 놓는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장을 법정 기록의 단순한 축약본으로 읽지 말고, 신구약 중간사부터 헤롯 가문과 로마 행정 체계까지 포괄하는 거대한 배경을 먼저 바라보라고 권한다. 예루살렘을 떠나 가이사랴까지 약 120km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장로들, 그리고 로마법 전문가 더둘로의 행렬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진리를 향한 순례가 아니라, 한 사람을 제거하려는 증오의 집요함이 종교의 언어와 제국의 사법 절차를 빌려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들이 도착한 가이사랴는 헤롯 대왕이 황제에게 충성의 메시지를 도시 자체에 각인시키고자 세운 상징적 공간이다. 바울이 호송 중 경유한 안디바드리 역시 헤롯 가문이 혈통과 권력의 기억을 돌로 새겨 둔 도시였다. 길의 방향, 도로의 명칭, 호송의 경로까지 권력의 체취가 밴 이 지리적 맥락 위에서, 장재형목사는 본문을 감싸는 공기 자체가 해석의 열쇠라고 말한다.
역사는 이 무대의 조명을 바꾸어 준다. 마카비 혁명으로 잠시 독립을 맛본 하스몬 왕조는 내부 분열로 로마를 끌어들이며 스스로 균열을 키웠고, 그 틈으로 에돔 출신 헤롯 대왕이 파고들었다. 헤롯은 정통성의 약점을 성전 중건과 정략결혼으로 보완하려 했지만, 그의 치세는 피의 숙청과 광적인 의심으로 기억된다. 영아 학살로 상징되는 잔혹성은 죽은 뒤에도 유산처럼 흘러 아켈라오의 폭정, 헤롯 안티파스의 세례 요한 참수, 예수 희롱이라는 어두운 장면들로 되살아났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어둠의 심장부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셨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한다. 빛은 어둠을 피해 주변을 맴돌지 않는다. 빛은 어둠의 중심으로 걸어 들어가 그것을 드러내고 가른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4장은 법정 문서가 아니라, 빛과 어둠이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맞붙는지 보여 주는 현장 보고서다.
총독 벨릭스의 존재는 이 보고서의 톤을 더욱 분명하게 만든다. 그의 아내 드루실라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딸, 곧 헤롯 대왕의 증손녀로, 권력의 윤리와 무윤리가 몸에 배어 있는 인물이었다. 벨릭스가 유대 종교와 정치의 미세한 균형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했으리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미 복음은 상층부까지 번져 있었다. 로마서 16장에 언급된‘아리스도불로의 권속’은 권력 엘리트 가정 내부까지 복음이 스며들고 있음을 암시하고,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 가운데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의 이름은 그 확산의 폭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장재형목사는 벨릭스가 바울을 관저 곁에 붙잡아 두고 2년을 끌었던 결정을 단순한 변덕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유대 지도자들의 압박과 그리스도 복음의 조용하지만 강력한 침투력 사이에서 균형을 따져 본, 두려움과 계산이 섞인 정치적 처신이었다.
재판이 열리자 더둘로는 상투적인 칭송으로 총독의 기분을 맞춘 뒤, 바울을 세 가지 혐의로 옭아맨다. 사회를 감염시키는 ‘염병’, 제국 질서에 반하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 신성한 공간을 더럽힌 ‘성전 모독자’. 이 프레이밍은 종교 내부의 이견을‘공공질서’와 ‘국가 안보’의 언어로 재배치함으로써, 바울을 신학적 논쟁의 상대가 아니라 체제의 위험분자로 전환하려는 수사적 장치였다. 장재형목사는 이 전략이 시대를 넘어 반복되는 통치 언어임을 지적한다. 오늘의 사회도 누군가를 배제할 때 종교적 이유보다 먼저 ‘안전’, ‘통합’, ‘시스템 보호’를 호명하지 않는가. 언어는 오래전부터 권력의 도구였고, 그 첫 용도는 낙인이었다.
바울의 변론은 낙인을 해체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는 체류 기간과 동선, 의도와 행위를 차분히 밝히며 사실관계를 다잡은 뒤, 논쟁의 핵심이 ‘도(道)’, 곧 신학적 판단에 놓여 있음을 선포한다. 그가 섬기는 하나님은 조상들의 하나님이며, 그가 믿는 바는 율법과 예언의 성취,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다. 이 말은 단지 신앙 고백이 아니라 절차적 함의를 지닌 선언이다. 사안이 공공질서 위반이 아니라 교리의 정합성에 관한 것이라면, 법정의 영역은 좁아지고 공동체의 토론이 넓어진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바울에게 신학은 권력의 주변부 장식이 아니라 중심축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은 제국이 관리하는 질서보다 더 깊고 오래된 법이며, 그 법 앞에서 모든 권력은 상대화된다. 바울은 법정에서 자기변호를 하지만,동시에 정체성을 선언한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이 말은 “나는 오직 제국의 심판만을 받는 자가 아니다”라는 뜻으로 확장된다.
며칠 뒤, 벨릭스는 드루실라와 함께 바울을 사적으로 부른다. 권력이 호기심을 충족시키려 마련한 조용한 시간처럼 보였을지 모르나, 바울에게 그 시간은 복음 선포의 카이로스였다. 그는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관해 담대히 강론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세 단어가 두 사람의 삶을 정면으로 겨누는 가장 불편하고도 필수적인 주제였다고 설명한다. ‘의’는 인간의 공로 계량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절대 선언이며, 동시에 불의한 통치의 거울이다. ‘절제’는 욕망의 폭주가 한 왕조를 어디까지 파괴하는지 보여 준 헤롯 가문에 대한 하나님의 해독제다. 그것은 억지 금욕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죄의 지배에서 풀려나는 자유의 기술이다. ‘장차 오는 심판’은 이 모든 주제를 추상에서 실존으로 끌어내린다. 지금의 권좌는 영원하지 않으며, 총독도 재판장도 결국 우주의 재판대 앞에 선다. 복음은 권력자에게도 공평하고, 바로 그 공평함이 권력에 대한 가장 깊은 비판이다.
벨릭스는 두려워한다. 그 두려움은 단순한 감정의 파도가 아니라 양심을 찌르는 성령의 찔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두려움을 회개로 이어가지 못하고 “지금은 가라, 때가 되면 다시 부르겠다”는 유예의 언어를 택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연이야말로 진리 앞에서 사람이 반복하는 가장 흔한 비극이라 말한다. 악의가 아니라 습관적 미루기와 계산이 결단을 무너뜨린다. 결국 벨릭스의 마음자리는 뇌물에 대한 기대가 차지한다. 양심에서 시작된 떨림이 이익 계산으로 덮여 버렸을 때, 진리는 ‘다음에’라는 빈 칸 속으로 미끄러진다. 질문은 우리에게로 돌아온다. 우리는 양심이 떨릴 때 무엇을 붙드는가. 변명인가, 수지타산인가, 아니면 순종인가.
표면적으로 2년은 불의의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이 시간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깊어짐의 시간’이 되는 역설을 강조한다. 침묵의 구간은 신학의 농밀함이 숙성되는 구간일 수 있다. 바울은 갇힌 자리에서 자신의 복음의 핵을 더 명료하게 정리하고, 기도 속에서 사명의 방향을 재정렬했으며, 하나님은 그 시간을 사용해 그를 로마의 심장으로 옮기는 계획을 준비하셨다. 전승에서 어떤 이는 이 시기와 연결되는 깊은 사유의 성과들을 거론하기도 하지만, 저작 문제를 떠나 분명한 것은 바울의 내면이 더 넓고 깊어졌다는 사실이다. 고난은 종종 진로를 막는 벽처럼 보이지만, 섭리의 시선으로 보면 고난이 곧 길이 된다. 교회 역시 실패처럼 보이는 계절을 통해 가장 깊은 신학과 가장 맑은 영성을 선물 받곤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속도와 다른 시간으로 일하신다. 지연은 포기의 다른 이름이 아니며, 침묵은 부재의 말줄임표가 아니다. 지연과 침묵 안에서 하나님의 성실은 더 단단해지고, 하나님의 때는 때맞춰 도래한다.
이 장의 심장부에 놓인 ‘도’는 단지 분파의 꼬리표가 아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놓인 생명의 길, 공동체 윤리, 인격적 순종의 행로를 가리킨다. 장재형목사는 이 ‘도’를 대표적 연합의 신학, 곧 연합 신학(federal headship)의 빛 아래서 설명할 때 그 결이 선명해진다고 말한다. 아담과 그리스도의 머리됨 안에서 인간은 옛 생명의 계수에서 새 창조로 옮겨지고, 의와 부활은 개인의 도덕 향상이 아니라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벌어지는 신분 이동의 사건이 된다. 그래서 바울의 변론은 단순히 혐의를 벗으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위치를 밝히는 고백이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이 한마디는 법정의 좌표를 바꾸고, 권력의 상대성을 드러내며, 신자의 용기의 근원을 설명한다. 제국의 심판대 위에 선 바울은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 사람이다. 이 긴장 속에서 그는 흔들리지 않는다.
오늘의 독자가 사도행전 24장 앞에서 배워야 할 것은 바울의 수사학이 아니라 그의 양심의 구조다. 그는 사실을 사실로 말하고, 신학을 중심에 두며, 권력자의 기호를 맞추지 않고, 사적인 자리에서도 복음의 본질을 흐리지 않는다. 이 네 가지 태도는 그리스도인이 일터와 공론장에서 견지해야 할 최소한의 윤리다. 우리는 더둘로의 수사를 닮아 누군가를 체제 위험으로 손쉽게 규정하지 않는지 스스로를 살펴야 하고, 벨릭스의 유예를 닮아 성령의 촉구를 “다음에”로 미루지는 않는지 점검해야 한다. 반대로 우리는 바울처럼 ‘도’를 살아야 한다. 의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선물이고, 절제는 성령의 열매이며, 심판은 현재의 권력을 절대화하지 못하게 하는 종말론적 분별력이다. 오늘의 언어로 바꿔 말하면 그것은 정직, 절제, 책임이다. 정직은 진실을 왜곡하지 않는 용기이고, 절제는 욕망의 속도를 낮출 줄 아는 지혜이며, 책임은 결과를 하나님 앞에서 감당하려는 결심이다. 이 세 단어가 개인의 윤리를 넘어 공동체의 체질이 될 때, 교회는 권력의 언어 대신 복음의 언어로 세상을 섬길 수 있다.
결국 장재형목사의 사도행전 24장 강해는 우리를 결단으로 데려간다. 권력과 불의 앞에서 생존을 위해 침묵할 것인가, 아니면 양심과 복음으로 서 있을 것인가. 바울의 길은 늘 손해처럼 보였으나, 역사는 그 길을 ‘복음의 전진’이라고 불렀다. 의와 절제와 심판을 말하는 입술은 시대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이 사람을 살리고 공동체를 정화한다. 벨릭스의 두려움이 잠시였던 것은 그 두려움이 회개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시작일 뿐, 복음은 그 시작을 은혜의 결말로 이끈다. 우리가 ‘다음에’를 버리고 ‘지금’을 택할 때,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 속으로 스며들어 역사를 새롭게 엮는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헤롯의 궁정과 로마의 법정을 닮은 언어로 자신을 합리화할 것인가, 아니면 바울의 양심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자신을 비추어 설 것인가. 장재형목사는 진리의 음성이 들릴 때 지체 없이 순종하라고, 이해할 수 없는 지연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라고, 계산보다 양심을 먼저 세우라고 촉구한다. 그 길이야말로 세상의 논리에 타협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의 본질을 담대히 증언하며, 마침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열매 맺는 증인의 길이다. 이 길 위에서 사도행전 24장은 오래된 문서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 쉬는 지도처럼 우리의 발걸음을 이끈다. 빛은 여전히 어둠을 향해 걸어가고,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 바울의 포로 된 시간은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결코 낭비되지 않았듯, 복음에 묶인 우리의 날들도 헛되지 않을 것이다. 이 확신이야말로 오늘 우리의 가이사랴와 예루살렘 사이, 권력의 복도와 법정의 복판, 사랑의 식탁과 기도의 골방을 잇는,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가장 거룩한 길이며, 장재형목사의 시선이 우리에게 다시 보게 하는 사도행전 24장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