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의 혼인 잔치 – 장재형목사

Ⅰ. 가나의 혼인 잔치 기적과 그 상징

가나의 혼인 잔치는 요한복음 2장 1절부터 11절까지 등장하는 매우 중요한 본문이다. 이 본문에서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첫 번째 표적이 기록되어 있다. 표적이란 단순히 기적이라고만 말하기 어려운, 보다 깊은 영적 의미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사건이다. 신학자들은 이 표적을 통해 요한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가장 핵심적인 신앙의 메시지가 압축적으로 드러난다고 해석하곤 한다. 특히 이 기적이 ‘첫 표적’이라고 명명된 이유는 예수님 사역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펼쳐질 영광의 축제를 예고하는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 안에서 장재형 목사가 이 본문을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예수로 인해 인생의 잔치가 갈수록 더 풍성해지고, 결코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이 멈추지 않는다”는 소망의 내용으로 귀결된다.

장재형(장다윗) 목사에 따르면, 우리가 이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볼 때 발견할 수 있는 첫 번째 중요한 특징은 ‘장소와 상황’이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라는 지역에서 한 혼인 잔치에 초청받으셔서 참석하신 것으로 사건을 시작한다. 갈릴리, 가나, 그리고 나사렛은 서로 가까운 지리적 특성을 가진 지역으로, 예수님이 주로 활동하셨던 갈릴리 사역의 전초라 할 만하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나사렛 예수’로 불리기도 하고, 사람들은 그분을 ‘갈릴리 예수’라고도 부른다. 그만큼 예수님의 정체성은 이 지역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혼인 잔치 자체는 매우 일상적이면서도, 동시에 유대 사회에서 중요한 축제적 의미를 지닌다. 가정이 세워지고 한 가문이 이어지는 중요한 의식이기에 잔치가 여러 날에 걸쳐 성대하게 치러진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잔치가 평범한 잔치가 아니라, 예수님이 첫 표적을 보이시는 무대로 변모한다는 점에서 영적 상징이 강해진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지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종종 우리의 일상 속에서 시작되며, 그 일상을 통로로 삼아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난다”고 역설한다. 가나의 혼인 잔치는 인생에서 흔히 맞닥뜨릴 수 있는 ‘기쁨의 자리’ 같지만, 갑작스러운 결핍이 찾아옴으로써 깊은 당혹과 수치심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 잔치를 주관하던 사람들에게는 큰 위기가 닥쳐온 것이다. 유대인의 전통적 결혼 풍습에 따르면, 혼인 잔치에서는 풍성한 먹거리와 마실 것이 손님들에게 제공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부족해진다면, 혼주와 신랑 신부는 결례를 범했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들은 깊은 곤란에 처하게 된다. 여기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은 단순히 축제의 분위기를 깨뜨리는 소소한 문제가 아니라, 영적으로 확장해 볼 때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근본적인 결핍과 좌절을 상징한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포도주가 없다”고 예수님께 말씀드렸을 때, 예수께서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답하신다(요 2:4). 여기서 ‘때’라는 단어가 중요한 신학적 함의를 지닌다. 요한복음 전체에서 예수님이 ‘나의 때’를 언급하실 때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궁극적으로 인류 구원을 위한 결정적 순간을 가리킬 때가 많다. 장재형 목사는 이 ‘때’의 개념을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역이 절정에 이를 시점, 혹은 최종적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연결지어 해석한다. 그러나 그런 ‘때’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신다. 이는 곧 지금 이 시점에서도 예수님은 결핍과 어둠, 절망에 빠진 이들을 돌아보시는 분임을 드러낸다. 아직 ‘온전한 때’는 아니지만, 이미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풍성함을 미리 맛보도록 베푸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망설이시는 듯 보이는 말씀이 담긴 이유에 대하여, 장재형 목사는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면 ‘아직 내 때가 아니다’라는 예수님의 표현이 무척 냉담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사실상 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보여주실 구원의 드라마에 대한 예고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처한 결핍이 아무리 긴급하고 중대하게 느껴져도, 그 결핍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국 하나님의 타이밍이고 구원의 큰 계획이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고통과 상황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며, 필요하다면 ‘때가 아직 아니’더라도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 삶에 개입해 주신다. 물이 변해 포도주가 되듯, 아무리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 삶이라 해도 예수님을 만나면 영광과 기쁨으로 바뀔 수 있음을 가나 혼인 잔치의 표적이 강력히 증언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사건에서 등장하는 ‘돌항아리 여섯 개’는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위한 용도로 사용되던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율법적으로 부정함을 제거하고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하기 위해 물로 씻거나 손을 정결하게 하는 의식을 치렀다. 즉, 이 돌항아리는 율법과 관련된 옛 예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돌항아리에 가득 물을 채우게 하시고, 나중에 그것이 포도주로 변하게 하신다. 이것을 놓고 여러 신학자들은 ‘옛 율법이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고 새 은혜의 시대로 들어가는 전환’을 시사한다고 해석한다. 장재형 목사 역시 비슷하게, 이 기적의 본질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인해 옛 전통과 율법의 그림자가 아니라, 본질인 새 언약이 주어지고 진정한 기쁨이 임한다”는 복음의 선언으로 본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사건은 단순히 결핍을 채운 놀라운 능력이 아니라, “이제 예수 안에서 참된 잔치, 참된 기쁨, 참된 구원이 임한다”는 표적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명령하시고, 그들이 순종했을 때 물은 포도주가 되었다. 기적은 예수님 스스로 물이 든 항아리에 손을 대서 바꾸신 것이 아니라, 하인들의 순종적 행위를 통해 현실로 나타난다. 이는 제자도(Discipleship)와 순종(Obedience)의 영적 원리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가 아무리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행동을 할지라도, 주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 순종이 일어날 때 그곳에 기적의 문이 열린다”고 말한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이뤄낼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며, 우리는 그저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놀라운 역사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혹은 신앙생활 가운데 종종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보면, 사람들은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혹은 ‘내가 그럴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 기적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는 “하인들이 아무 말 없이 물을 채우는 순종을 했을 때” 비로소 예수님의 전능하심이 드러났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성도들의 협력과 기도로 인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새롭고 풍성한 은혜가 ‘표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고 장재형 목사는 강조한다.

본 사건은 요한복음 2장 11절에서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고 결론을 맺는다. 예수님이 영광을 나타내셨고, 그 결과 제자들이 더욱 견고하게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게 되었다는 의미다. 즉, 이 기적의 목적은 단순한 문제 해결에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포도주가 떨어진 문제를 해결받았다. 잔치는 다시 활기를 띠고 마지막까지 풍성히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훨씬 더 큰 목적, 곧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 드러나고, 그분을 믿게 하는 것’이 숨어 있다. 기적은 결핍을 채워주는 일차적 효용을 갖지만, 결국 기적이 향하는 궁극적 목적지는‘예수님을 바라보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수를 알고 믿게 된 자들은 더 이상 인생의 잔치가 허무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장재형 목사는 이 기적 사건을 두고 “잔치가 갈수록 좋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세상은 대체로 처음에는 화려하고 좋은 것을 내놓다가, 시간이 지나면 점점 열정이 식고 권태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 잔치는 반대로 후반부에 더욱 좋은 포도주가 나타나고, 처음보다 훨씬 더 나은 기쁨을 맛보게 된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방향성, 곧 “예수 안에서의 여정은 갈수록 더 깊어지고 풍성해지는 축제”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표적은 단순히 과거 어느 시점에서 있었던 외적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심오한 현실이 된다. 그분은 우리의 결핍을 새로운 차원의 은혜로 채워주실 뿐만 아니라, 결국 더 깊은 영광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이 가나 혼인 잔치 기적을 통해 우리는 신앙의 핵심 질문 하나를 마주한다. “과연 우리의 삶에 예수님이 임재하실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물이 포도주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수고와 재료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완전히 다른 가치와 본질을 띠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동시에 이는 종말론적 희망, 곧 요한계시록 21장에 예고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벌어질 영원한 혼인 잔치에 대한 예표로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일시적으로 ‘포도주’의 기쁨을 맛보게 하실 뿐 아니라,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이어질 완전한 축제와 기쁨을 우리에게 보증하신다.

결국 이 기적이 ‘첫 표적’으로 소개된 요한의 의도는 명확하다. 예수께서 행하시는 모든 능력과 표적은 그분이 참 하나님이시며, 참된 구원자이심을 증언하기 위함이다. 그 표적을 통해 사람들은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믿게 된다. 한편,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인생의 결핍이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나아갈 때,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은혜의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는 신앙 확신을 얻는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설교와 강의를 통해 전하며, 가나 혼인 잔치의 핵심 정신을 ‘영적 결핍을 영적 풍성함으로 전환시켜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로 정의한다.

이처럼 가나의 혼인 잔치 기적은 한 개인이나 가족, 혹은 공동체가 단순히 결핍에서 회복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이상으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과 하나님 나라의 기쁨, 율법이 아닌 은혜로 살아가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나타내는 표징(sign)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반드시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자리 잡고 있다.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도 즐거움이 사그라들고 소망이 끊길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순간에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마리아의 격려처럼 전적인 순종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잔칫집에 새롭게 깃드는 기쁨을 발견한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처음보다 더 좋은 포도주가 나중에 나타났듯이, 우리 인생도 후반부에 더 깊고 놀라운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사실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면서, “교회 공동체와 성도들의 신앙생활도 갈수록 더 뜨겁고 좋은 포도주가 되어야 한다”고 설파한다.

이런 관점에서 가나의 혼인 잔치는 성도로서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자주 새겨져야 할 메시지를 던진다. 세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것이 시들해지고, 결국 죽음과 절망으로 끝나기 마련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는 잔치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더 풍성한 기쁨, 더 성숙한 사랑, 더 충만한 은혜가 베풀어진다. 여기서 ‘더 좋은 포도주’는 단순히 품질이나 맛의 우수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변화와 영적 풍성함을 가리킨다. 우리는 세상의 잣대로 볼 때 도무지 해결될 수 없는 문제, 예컨대 죽음과 죄의 문제까지도 예수님 안에서 해답을 얻는다. 이 기적이 표적이고 상징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 임하시고, 아무리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상황이라 해도 그 속에 영원한 희망을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장재형 목사는 또한 “포도주가 떨어지는 경험은 인생에 필연적으로 닥치는 고통과 결핍의 비유이기도 하지만, 이 결핍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연약함이 오히려 주님의 강함을 드러내는 기회가 된다”는 바울의 고백과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성도는 절망이 깊어질 때마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예수님을 통해 내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더욱 굳게 붙들어야 한다. 가나 혼인 잔치의 예수님처럼, 지금도 주님은 우리의 작은 순종을 통해 포도주가 떨어진 인생 자리에 기적을 일으키신다. 그것이 바로 ‘첫 표적’으로부터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드라마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증거이기도 하다.

결국 이 모든 메시지가 종합적으로 지향하는 결론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 인생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는 점이다. 예수를 만나기 전과 만난 후가 극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결핍을 채우시고 기쁨을 회복시키는 ‘단발성’ 은혜를 넘어, 우리 존재 전체를 새롭게 빚어내시는 창조주의 능력자이기 때문이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맛보게 된 새로운 포도주는, 궁극적으로 요한계시록 21장에서 볼 수 있는 새 예루살렘에서 펼쳐질 영원한 잔치의 예고편이라 할 수 있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는 사건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을 때 우리의 죽을 몸이 부활의 몸으로 변화되고, 우리를 옭아매는 죄와 죽음의 권세가 영원히 사라지는 전환을 예표한다. 이 기적을 체험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이미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며 살아갈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이해의 틀에서 가나 혼인 잔치가 주는 교훈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특별히 빛을 발한다. 교회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잔치가 미리 시작되는 자리라고 말할 수 있다. 성찬을 나누고 예배를 드리는 것은 단지 종교 의식이 아니라, ‘떨어진 포도주’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다시 채우는 상징적 순간이 된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단지 종교 활동을 제공하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진정한 기쁨과 생명을 누리도록 돕는 살아 있는 몸(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기적’이 실제로 일어나는 곳, 곧 상처 입은 자들이 치유되고, 절망하던 이들이 희망을 얻게 되며, 죄인들이 의인으로 거듭나는 역사가 계속해서 펼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정결 예식을 위한 돌항아리가 예수님 손에 맡겨졌을 때,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듯이, 교회와 성도는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을 예수님께 기꺼이 맡겨야 한다. 우리의 시간을, 재능을, 재정을, 또 삶의 우선순위를 주님께 맡길 때, 그 지점에서 비로소 물이 포도주로 변한다. 이 원리는 지금도 유효하며, 과거 어느 시대의 성자나 사도들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성도는 매일의 삶 속에서 가나 혼인 잔치가 재현되는 ‘작은 표적’을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때가 아직 완전히 오지 않았지만, 동시에 이미 부분적으로 임한 종말론적 시간”을 살아가는 신자들의 특권이다.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도 유효하게 역사하는 복음의 능력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결국 요한복음 기자가 가나의 혼인 잔치를 배치한 이유, 그리고 그 이야기를 ‘첫 표적’이라고 부른 의도는 매우 분명하다. 예수님의 정체성과 예수님이 가져오시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포도주라는 은유로 강렬하게 표현한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기쁨과 영광’이 있다. 동시에 예수님이 역사하시는 자리에는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지는 은혜의 사건이 일어난다. 그 은혜를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종말론적 희망을 미리 맛보게 하시며, 또한 이를 통해 세상에 복음의 기쁨을 전하라고 우리를 파송하신다. 장재형 목사는 이 메시지를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다”는 연회장의 놀라움과 연결해 설파한다.인생이 점점 수그러들고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후반부에 더 풍성해지고, 종국에는 영광스러운 부활에 이른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희망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과 그 상징은 단순한 기적담을 넘어, 예수님의 메시아적 정체성과 구원 사역,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에 대한 중요한 선언이 된다. 결핍과 절망이 아니라, 회복과 생명이 강조되는 이 표적을 통해 성도들은 한층 분명해진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우리의 결핍이 하나님의 풍성함으로 대체되고, 세상의 절망이 영원한 소망으로 옮겨진다. 바로 이것이 장재형 목사가 가나 혼인 잔치 본문을 통해 일관되게 전하는 복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Ⅱ. 인생의 결핍과 예수 안에서의 희망

우리가 흔히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부른다. ‘쓰디쓴 바다’라는 뜻으로, 인생에 닥치는 크고 작은 고통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세상의 많은 철학과 문학은 인간의 유한성과 허무함, 그리고 그로 인해 찾아오는 고통과 절망을 비관적으로 그려왔다. 전도서 역시 시간의 흐름과 인생의 무상함을 토로하며 “헛되고 헛되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 특히 가나 혼인 잔치 사건이 보여주는 핵심 메시지는 이러한 비관적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뒤집는다. 결핍과 고통이 분명 현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한 결핍조차도 기적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장재형 목사가 끊임없이 강조하는‘변화와 희망’의 신학이 녹아 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잔칫집은 일순간에 절망적 분위기로 뒤덮였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우리가 실제 삶에서 자주 직면하는 문제들을 상징한다. 예를 들어, 청년 시절에는 무한한 가능성과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 차 있지만, 나이가 들고 삶의 무게가 더해지면서 점점 기쁨과 여유가 사라지고, 결국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라는 현실이라는 인식이 대표적 예다. 당장 주변에 넘쳐나는 결혼식장에서 주례자나 축사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두 사람이 오래도록 행복하기를 기원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점점 처음의 설렘이 사라지고 갈등과 무거운 책임감이 커져간다는 경험을 하지 않는가? 이에 더해 전도서12장에서 묘사하는 ‘노년에 찾아오는 무너짐’—시력이 흐릿해지고, 청력이 떨어지고, 미각도 잃어버리며, 육체의 욕망까지 사라지는 광경—은 결국 모든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가나 혼인 잔치 기적이 말해주는 복음은, 이처럼 잔치가 끝나가는 듯 보일 때 오히려 더 좋은 포도주가 예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인생 잔치는 갈수록 기쁨이 커지지 결코 잦아들지 않는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희망의 메시지를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 중 하나라고 자주 설명한다. 그는 “세상의 결혼식이나 축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그 열기가 식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님이 계신 잔치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은혜와 기쁨이 공급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인생의 결핍은 예수님 안에서 더 큰 은혜를 맛보는 기회가 되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은혜가 더 깊어지고 풍성해진다는 것이다.

이 희망은 단지 죽음 이후 천국에 가게 된다는 사후적 믿음에 그치지 않는다. 물론 기독교는 “죽음 이후에도 생명이 있다”는 부활 신앙을 선포한다. 그러나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사건”은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미리 체험하게 하는 복음의 능력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세속적 가치관에 사로잡혀 ‘살아있는 동안 최대한 즐기고,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는 태도와 완전히 다르다. 성도에게 주어진 삶은 갈수록 어둠이 짙어지는 여행이 아니라, 갈수록 더 밝아지고 생명으로 가득 찬 길이 된다. 세상 사람들이 “결국은 허무와 죽음뿐”이라고 탄식할 때, 예수를 믿는 자들은 “마지막 순간에도 더 좋은 포도주가 예비되어 있다”고 선포한다.

이처럼 가나 혼인 잔치가 보여주는 결핍에서 기적으로의 전환은 성도에게 실제적인 삶의 지침이 된다. 삶 속에서 우리가 자주 마주하는 ‘포도주가 떨어짐’—재정적 곤란, 육체적 질병, 인간관계의 갈등, 마음의 우울과 불안 등—은 모두 예수님의 개입과 능력을 구할 수 있는 기도의 제목이 된다. 장재형 목사는 “기도는 하늘 문을 여는 열쇠”라고 자주 말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기도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때를 향해 열린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고, 동시에 하인들이 물을 채웠듯 우리도 행동으로 순종할 준비를 갖추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을 목도하게 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믿음으로 얻는 기적의 원리’이다.

장재형 목사는 실제 사역 현장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결핍과 고통을 가지고 나아올 때, 가나 혼인 잔치 이야기를 자주 예화로 든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완전히 막막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으로 인한 역전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삶에 초대하면, 우리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도 그분의 주권적 섭리와 자비 안에서 새로운 길이 열린다. ‘기적’이라는 단어가 종종 과장되거나 오해되기도 하지만, 사실 성경의 기적들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모든 만물의 주권자이심을 드러내는 이적(sign)이자 메시지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가나 혼인 잔치의 사례로부터 그런 기적이 오늘 우리의 삶에도 일어날 수 있다는 근거를 얻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기 전, 하인들이 적극적으로 순종했다는 것이다.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는 명령을 들었을 때, 그들은 토를 달지 않고 물을 채웠다. 이후 “이제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는 지시에도 그대로 따랐다. 그리하여 연회장이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놀라워했다. 이 장면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순종의 중요성을 극적으로 부각시킨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은 대개 인간의 협력을 요구한다. 우리가 기도할 뿐 아니라, 그 기도 제목에 합당한 행동을 할 때, 즉 믿음의 실천을 동반할 때 기적이 완성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양적 증대가 질적 변화를 불러일으킨다”는 표현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하인들이 물을 차고 넘치도록 채우자, 마치 그 양적인 충만함이 질적 변화, 즉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불러온 것처럼, 우리의 기도와 순종이 일정한 임계점을 넘으면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놀라운 일들이 현실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행위 공로’ 개념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기적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권적 선물이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인간의 자발적 순종을 통해 역사하신다. 그 순종은 우리의 의(義)를 뽐내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존중하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길에 스스로를 내어드리는 행위다. 믿음 없는 사람들에게는 “물로 된 포도주”가 그저 어리석은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에 그대로 응답하는 자들은 그 기적의 현장을 직접 목격할 수 있다. 요한복음 2장 9절에서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고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역사는 순종한 자들이 체험하고 알게 되는 은혜다.

장재형 목사가 누누이 강조하는 부분은 바로 이 점이다. 세상 사람들은 “아직도 그런 기적을 믿느냐”고 비웃을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를 믿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이들은 적어도 자기 삶 속에서 벌어진 수많은 ‘작은 표적들’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 실재를 안다. 그것은 과학적으로 증명해야만 하는 실험 데이터가 아니라, 인격적인 만남과 관계 속에서 확신할 수 있는 진리다. 물을 길어 연회장에게 갖다 준 하인들처럼,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며 한 걸음씩 나아갈 때, 비로소 눈앞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일’을 목격하게 된다.

나아가 이러한 체험적 믿음은 우리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낸다. 장재형 목사는 “예수 없는 세상은 근본적으로 어둡고 절망적”이라고 진단한다. 죽음이라는 현실은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이며, 그 무엇도 죽음의 문제 앞에서는 유효한 해답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는 심지어 죽음조차도 새로운 생명을 향한 문이 될 수 있다. 가나 혼인 잔치 기적은 죽음이라는 근본적 어둠을 직접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그 결핍과 어둠의 전조를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건으로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예수님의 개입으로 그 어둠이 기쁨의 축제로 전환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는 곧, 삶 전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더 큰 전환’—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지는 구원—을 예고하는 셈이다.

장재형 목사는 설교 중 종종 “우리가 죽음의 열차를 타고 가다가, 예수님을 믿고 천국을 바라보는 순간, 열차의 종착역이 바뀌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세상 논리로 보면 인생의 마지막은 죽음의 어둠이지만,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늘 잔치로 이어지는 길로 바뀐다. 죽음의 절망이 영원한 생명의 소망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 복음이 가진 근본적인 힘이야말로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을 굳게 믿게 만드는 근거가 된다. 왜냐하면 죽음조차 거뜬히 이기신 분이라면, 그 무엇도 우리를 영원한 절망으로 몰아넣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생의 결핍과 예수 안에서의 희망’은 단순한 심리적 위로나 종교적 긍정 사고방식을 넘어서는 깊이를 가진다. 가나 혼인 잔치 사건 속에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으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때가 되면 결국 예수님이 우릴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결핍의 극단’을 해결하실 것이라는 예고다. 실제로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는 길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분이 다시 오실 때(재림)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 이상‘포도주가 떨어지는 상황’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영원한 기쁨의 혼인 잔치가 열릴 것이다. 요한계시록 21장이 묘사하는 새 예루살렘에서의 잔치가 바로 그것이다. 그곳에서는 모든 눈물이 사라지고, 사망이 더 이상 없으며, 애통하는 것이나 고통도 다시 있지 않다고 한다. 이것이 ‘더 좋은 포도주’가 결국 상징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우리가 결핍을 경험할 때, 그것은 결코 허무와 실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우리는 더욱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의 능력을 구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길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우리는 우리 삶의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는 ‘순종의 행위’를 실천함으로써,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 이때, 그 체험은 단지 개인의 만족을 위한 사적인 경험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와 세상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증언이 된다. 연회장 같은 사람들은 “이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지만, 물을 길어온 이들은 그 비밀을 알고 있듯이,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깊은 영적 실재를 맛보며 산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구원받은 자의 담대함”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더 이상 절망의 지점에서 좌절하거나 주저앉지 않는다. 비록 세상이 허무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진단하더라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생명과 영광을 향해 달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세상에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구걸하는 태도로 전도하지 않는다. 마치 탁발하러 다니는 스님이 시주를 구걸하듯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초대하는, 그래서 그들에게도 ‘더 좋은 포도주’를 맛보도록 권하는 권세 있는 전도자가 될 수 있다. 이는 “전도를 우리가 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이뤄놓은 풍성한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해 오는 것”이라고 하는 인식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맞닥뜨렸던 결핍이나 절망이 예수님 안에서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 깨닫게 된다.

이 결핍과 희망의 대조는 오늘날 교회가 어떠한 정체성을 가져야 하는지를 재점검하게 만든다. 교회 안에도 결핍이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재정적 어려움, 성도 간 갈등, 사역의 한계 등 다양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교회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순종의 길을 걸어간다면, 그 결핍도 기적으로 바뀔 수 있다. 교회의 역사를 돌아봐도, 가장 어려운 시기에 오히려 놀라운 부흥과 개혁이 일어났던 사례가 무수히 많다. 초대교회가 박해 가운데에서도 더욱 강건해졌고, 종교개혁 시기에 부패한 중세 교회에서 말씀이 회복되며 새로운 교회 운동이 일어난 것처럼, 결핍과 위기는 영적 갱신을 불러오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이 아니라, 가장 강력한 생명체”라고 표현한다.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생명력과 믿음으로 움직이는 공동체라는 의미다. 그래서 세상에 대고 ‘한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외쳐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는다.

인생의 결핍에서 예수를 통해 얻는 희망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상황을 변화시키는 근원적 소식이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떨어진 포도주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풍성히 공급되었듯, 우리 삶의 다양한 현장에서도 똑같은 원리가 작동한다. 다만, 우리의 문제는 종종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숨기거나 외면한다는 데 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우리가 “주여,포도주가 다 떨어졌습니다”라고 솔직히 고백할 때, 비로소 주님이 일하신다. 그리고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마리아의 조언대로 순종하기 시작할 때, 기적은 현실이 된다. 이 프로세스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이론이 아닌 실제가 됨을 체득한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자기 영광을 드러내셨고, 그 결과 제자들이 그분을 믿게 되었다(요 2:11). 이 구조는 지금도 그대로 유효하다. 결핍이 클수록 기적이 드러날 여지가 크고, 그 기적을 통해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나며, 믿는 자들의 믿음이 더 강해진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기독교 신앙의 역동성(Dynamic)이라고 부르며, “믿음이 깊어질수록 더 큰 결핍 앞에서 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과 아픔을 거쳐가는 과정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촉매제로 삼아야 한다. 이는 결코 ‘고통을 미화’하거나 ‘문제를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이 하나님을 찾게 만드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한편으로, 성도들이나 사역자들이 지나친 ‘행복론’이나 ‘번영신학’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라고도 가르친다. 결핍을 다루는 과정에서 무조건 “예수 믿으면 다 잘된다”는 식의 단순화된 메시지를 전하면, 오히려 사람들을 낙심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기독교인도 때로는 실패하고 질병에 시달리며 경제적 어려움에 부딪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나 혼인 잔치 기적은 “이 땅에서 당장 우리의 모든 문제가 없어질 것”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그것보다는 “설령 잔치가 끝날 것 같은 절망적 순간이라도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보증을 준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의 결핍을 채우고도 남는 더 좋은 포도주를 주실 수 있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따라서 성도는 모든 상황을 낙관적으로만 보는 태도가 아니라, 결핍과 아픔을 객관적으로 인정하되 예수님께 해결을 구하고 맡기는 ‘믿음의 태도’를 배우게 된다.

이처럼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은 ‘인생의 결핍과 예수 안에서의 희망’이라는 주제를 가장 극적으로 나타내는 본문 중 하나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전환은 곧 ‘절망에서 소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어지는 전환을 암시하며, 예수님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 어떤 분인지 확실히 각인시킨다. 그리고 이 사건은 단순히 과거 한 시점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성령의 역사 가운데 동일한 원리로 재현될 수 있다. 교회가 이 진리를 굳게 붙들 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결핍 투성이인 공동체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더 좋은 포도주’를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 하나님 나라의 대사관이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교회는 희망을 만들어 내는 곳이라기보다, 이미 주어진 희망을 증거하고 분배하는 곳”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희망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미 약속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가나 혼인 잔치는 예수님의 사역이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서막이다. 첫 표적이라는 명칭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미 서술했듯이 이 표적은 우리에게 “절망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은혜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통찰을 준다. 인생을 살다 보면 우리의 예측과 준비가 무색해질 정도로 갑작스럽고 치명적인 결핍이 닥쳐올 수 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는 결코 마지막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 영광이 드러날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신앙적 확신이 주어진다. 그래서 우리 역시 마리아처럼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다”는 사실을 아뢸 수 있고, 하인들처럼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순종을 실천할 수 있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인생 한복판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은혜가 현실이 된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바대로, 이 희망이야말로 교회와 성도가 세상에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포도주가 떨어지는’ 경험, 곧 각종 결핍과 불안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사람들은 그러한 결핍을 잊기 위해 일시적인 쾌락과 중독에 빠지거나, 극단적 선택을 통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교회는 단호히 “아직 더 좋은 포도주가 준비되어 있다”고 외쳐야 한다. 그리고 그 말이 헛되지 않도록, 실제로 교회 공동체 안에 기적이 일어나는 현장을 만들어야 한다. 불가능해 보이던 인간관계의 회복이나 치유가 이뤄지고, 절망하던 이가 희망으로 일어서는 이야기가 교회 안에 가득해야 한다. 그때 세상은 “어디서 이런 포도주가 났느냐” 하고 놀라워할 것이고, 그 비밀을 아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고 간증하게 된다.

인생의 결핍과 예수 안에서의 희망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주제다. 우리는 모두 결핍 속에 있으나,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풍요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의 첫 표적이 보여주었듯, 그분은 언제나 우리가 상상조차 못했던 방식으로 가장 좋은 것을 마지막에 내놓으신다. 그러니 현재의 고통과 좌절은 영원하지 않고, 주님의 기적은 언제나 더 놀랍게, 더 풍성하게 우리를 찾아온다. 이러한 메시지를 품고 살아가는 성도는 결핍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세상을 향해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장재형 목사가 가나 혼인 잔치 본문을 통해 일관되게 선포하는 복음의 정수다. 그리고 이 복음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가운데서 살아 움직이며, 개인과 교회 공동체를 변화시켜 ‘더 좋은 포도주’의 잔치를 계속해서 펼쳐 나가도록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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