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어둠의 미학을 전복하는 하늘의 서광
이탈리아의 거장 카라바조(Caravaggio)가 선보인 화폭 위의 강렬한 명암대비(Chiaroscuro)는 단순히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장치가 아닙니다. 어둠의 깊은 심연을 예리하게 찢고 들어오는 한 줄기의 절대적인 광선은, 인간의 시각이 오랜 시간 길들여져 있던 밤의 질서를 단숨에 전복시키며 주위의 모든 사물을 낯설고 새롭게 대면하게 만듭니다. 그 빛은 사물의 외형을 보기 좋게 치장하거나 미화하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깊은 어둠 속에 음험하게 은닉되어 있던 인간의 적나라한 안면과 완고하게 굽어 있는 내면의 실상을 가차 없이 폭로합니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가 선포하는 로마서 13장의 주해적 메시지 역시 이와 같은 거룩한 빛의 충격을 닮아 있습니다. 이 설교는 성도가 이 세상의 가시적인 국가 체제와 권세 앞에서 어떠한 영적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지, 타인과 이웃을 대할 때 마땅히 짊어져야 할 거룩한 ‘사랑의 빚’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종말의 때가 임박한 깊은 밤 같은 세대 속에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영광스러운 옷을 입고 종말론적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엄중하게 질문합니다.
장재형 목사의 영적 안목은 로마서 13장을 세상의 통치 체제에 대한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복종을 종용하는 얄팍한 훈계의 단편으로 전락시키지 않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장 말미에서 강력하게 선언했던 영적 대원칙, 곧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그리스도교적 핵심 권면이 어떻게 13장의 거시적인 국가 질서, 위정자의 권세, 납세의 의무와 공적 공경, 더 나아가 종말론적 깨어 있음과 사랑의 대계명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지를 예리하게 짚어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나라의 거룩한 시민권을 소유한 자인 동시에, 자신이 발을 딛고 살아가는 역사적 지평 속의 지상 시민이라는 중첩된 자리를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이 이중적 정체성은 신앙을 차가운 현실 세계로부터 도피시켜 관념화하지 않으며, 도리어 살아 숨 쉬는 양심과 희생적인 사랑을 무기로 삼아 모순 가득한 현실 한복판을 정면으로 통과하게 만드는 동력이 됩니다.
따라서 이 설교가 담고 있는 복음주의적 통찰은 단순한 정치적 선동이나 세속적 차원의 도덕적 훈계보다 훨씬 깊은 신학적 궤적을 그립니다. 참된 복음의 능력은 국가 권세를 바라보는 영적 시선에서, 세금을 납부하는 일상의 정직함 속에서, 주변 이웃들을 향해 베푸는 지극히 작은 책임의 이행 속에서, 그리고 다가올 종말을 대망하며 하루를 살아가는 실존적인 습관 전체를 통해 비로소 자기 자신을 입증합니다. 이로써 성경 묵상은 서재의 책상 위에서 향유하는 고요한 문자적 유희에 머물지 않고, “나는 오늘 어떠한 신앙의 옷을 입고 거친 세상 앞에 단정히 설 것인가”를 끝없이 추궁하는 엄숙한 실존적 질문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2. 신적 주권 아래서 해체되는 권세의 절대화
로마서 13장에서 모든 권세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다는 사도의 선언은, 결코 지상의 군사력이나 정치권력을 무조건 우상화하고 신격화하라는 면죄부가 아닙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가 지닌 가치는 바로 이 민감한 지점을 대단히 섬세하고 균형 잡힌 필치로 풀어낸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사회의 혼란을 막기 위해 제도적 질서를 임시로 허락하셨다는 신학적 사실과, 타락한 인간이 운영하는 모든 지상 권력이 언제나 하나님의 공의로운 뜻을 온전히 대변하고 있다는 명제는 결코 동일 선상에 놓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참된 믿음은 권력을 향한 맹목적인 노예적 굴종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동시에 분노와 증오를 동력으로 삼는 폭력적인 아나키즘(Anarchism)적 반항으로 귀결되지도 않습니다.
설교의 논리적 흐름에 따르면, 교회가 국가 권력과 관계를 맺을 때 가장 우선시해야 할 가치는 신앙의 근원적인 순결성을 수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성도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법제도적 틀 안에서 양심을 따라 신실하게 기능하는 모범적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사회적 불의를 눈감아주거나 구조적 악의 연대에 침묵으로 동조하는 것은 결코 십자가 복음의 정신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을 대적하고 무너뜨린다는 명분을 앞세워 세상의 방식, 즉 상대방을 향한 증오와 저주, 무자비한 폭력과 거짓 선동의 메커니즘을 그대로 모방하여 끌어들이는 것 역시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신자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유약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피가 끓어오르는 복수의 본능을 십자가 앞에 온전히 굴복시키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를 신뢰함으로 끝까지 선을 선택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영적 외유내강의 힘입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마주해야 할 사회적 연대의 책임이 새롭게 정의됩니다. 성실하게 세금을 납부하고, 공적인 사회 질서를 존중하며, 타인의 삶과 안녕을 해치지 않으려는 태도는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난 주변부의 도덕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던 예수 그리스도의 공관복음서적 선포처럼, 오직 하나님께 온전히 속한 하늘의 백성이 이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책임감 있는 실존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성육신적 삶의 양식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세속적 가치관과 동화되거나 타협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세상을 무조건 적으로 규정하고 혐오함으로써 자신의 거룩함을 증명하려는 폐쇄적 바리새주의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참된 거룩함은 현실 세계를 뒤로하고 홀로 고고하게 차려입는 은둔의 흰 옷이 아니라, 오염된 세상의 진흙탕 속에서도 침식당하지 않으려는 깨어 있는 양심의 치열한 전투입니다.
사도 바울이 도달한 영적 역설의 심연은 여기서 한층 더 깊어집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사도의 삶을 무참히 짓밟는 것처럼 보였던 로마 군인들에 의한 불합리한 감금과 죄수의 몸으로 호송되던 그 참담한 고난의 행로조차도, 하나님의 거대한 주권과 경륜 속에서는 복음의 서광이 제국의 심장부인 로마의 한복판으로 거침없이 진격해 들어가는 보이지 않는 구원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이 경이로운 역사적 장면을 복기시키며, 교회가 세상의 위협적인 힘 앞에서 불필요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거나 반대로 맹렬한 적대감에 휩싸여 중심을 잃고 흔들리지 말아야 함을 역설합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자는 세상의 권력을 신격화하여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그 권력이 뿜어내는 악독한 성정을 그대로 닮아 복수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도 않습니다.
3. 은혜의 빚진 자가 실천하는 삶의 총체적 법전
로마서 13장 8절에서 사도가 선포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문장은, 낭만적인 문학의 언어나 가벼운 감상주의적 수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보혈로 대속함을 받은 구원받은 실존이 자기 존재의 위치를 우주 안에서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존재론적 선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구원의 은혜는 아무런 대가 없이 거저 주어졌지만, 그 ‘값없음’은 결코 가벼운 싸구려 은혜(Cheap Grace)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그 어떤 자산으로도 감히 계산할 수 없기에 ‘값으로 매길 수 없는(Priceless)’ 절대적 가치를 지닙니다. 도저히 내 힘으로는 청산할 수 없는 무한한 사랑의 채무를 지고 있기에 평생 동안 갚아 나가야 하며, 다 갚았다고 선언할 수 있는 지점이 결코 존재하지 않기에 매일 아침 겸손하게 타인과 이웃을 향해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구체적인 태도, 이것이 바로 복음이 요구하는 고차원적인 윤리의 출발점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강해는 구약의 모든 다층적인 율법의 완성을 오직 그리스도교적 ‘사랑(Agape)’ 안에서 발견합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는 등의 십계명적 금령들은 결코 파편화된 규율들의 나열이 아닙니다. 이 모든 계명은 궁극적으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단 한 줄의 대계명 안으로 온전히 수렴되고 귀취됩니다. 사랑은 골방에 앉아 인류를 향해 품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선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 곁에 있는 구체적인 이웃에게 작은 해악이라도 행하지 않으려는 실질적인 행동의 절제이며, 사회적 타인의 생명권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내 권리를 기꺼이 양보하는 실제적인 순종의 발걸음입니다. 행동과 대가가 따르지 않는 말뿐인 사랑은 언제나 손쉽게 아름다워 보이지만, 이웃의 고통을 나누어 짊어지려는 영적 책임감이 거세된 사랑은 결국 바람에 날리는 허무한 겨와 같이 금세 빈껍데기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 지점에서 성경 묵상의 위대함은 성도의 가장 작고 소박한 일상의 영역으로 성육신하여 내려옵니다. 사회가 규정한 공적인 법적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편법과 탐욕을 부리면서 이를 신앙의 이름이나 은혜의 외피로 기만적으로 덮어버리지 않는 것, 그리고 공동체 내에서 고통받는 약한 이웃을 향해 자신의 지갑과 마음의 손을 활짝 펴는 것, 이 소박해 보이는 모든 삶의 파편들이야말로 내가 하나님 앞에 ‘사랑의 빚진 자’임을 날마다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는 가장 거룩한 예배의 방식이 됩니다. 참된 기독교적 믿음은 자아 내면에 갇혀 있는 주관적인 확신이나 감정적 도취로 머무를 수 없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내 곁에 서 있는 지극히 작은 이웃의 얼굴 앞에서, 자신의 진실성과 영적 무게를 엄격하게 시험받게 되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사랑의 채무 의식은 신앙 공동체의 언어 구조와 소통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혁신합니다. 성도의 의무가 율법적인 강요나 억지 책임으로만 다가올 때 인간은 언제나 비난을 피할 수 있는 최소한의 형식적 의무만을 수행하려 꾀를 부립니다. 그러나 자신이 십자가의 무한한 사랑의 빚을 지고 있음을 늘 자각하는 성도는, 율법이 요구하는 의무의 한계선을 가볍게 뛰어넘어 어떻게 하면 내 곁의 지체와 이웃에게 진정한 영적·물질적 유익을 끼칠 수 있을까를 먼저 치열하게 고민합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가 지향하는 아가페의 본질은 자아를 세상의 중심에 배치해 두고 행하는 조건부 애착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에게 상처를 입히고 박해하는 가해자에게까지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확장해 나가는 거룩한 자기희생의 방향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율법을 파괴하거나 폐지하는 반율법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율법의 정신을 온전하게 성취하는 최고의 완성입니다. 인간의 법 제도가 외적인 행동의 질서를 간신히 붙잡아두는 역할을 한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차디찬 법의 골격 속에 생명의 온기와 영적인 호흡을 불어넣는 신성한 생기입니다.
4. 깊어가는 밤의 한복판에서 빛의 갑옷을 제구하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 11절을 통해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라고 준엄하게 외칩니다. 이 사도의 외침은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온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공포 마케팅이나 맹목적인 종말론적 구호와는 궤를 완전히 달리하는 고도의 신학적 통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Already) 구원의 새벽은 동텄으나, 아직(Not Yet) 재림의 완전한 도래를 기다리며 역사적 긴장 상태를 살아가는 성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라는 유한한 시간을 결코 방탕하게 낭비하거나 허투루 소비할 수 없습니다. 밤이 깊어가고 낮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사도의 우주적 선언은, 신자로 하여금 이 세대가 처한 도덕적·영적 어둠의 실상을 추호의 타협도 없이 정확하게 직시하라는 청천벽력 같은 경고이며, 동시에 그 깊은 어둠의 관습과 문화에 동화되어 익숙해지지 말라는 거룩한 소명으로의 초대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강해는 본문에 등장하는 방탕과 술 취함, 음란과 호색, 다툼과 시기라는 죄악의 목록들을 결코 2천 년 전 고대 로마 제국의 타락한 도심 속에서나 존재했던 빛바랜 풍속도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언제든지 손쉽게 집어삼키는 ‘어둠의 언어’들이자 고질적인 죄의 본성들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거센 어둠의 물결에 휩쓸려 영적 수면에 빠져들게 된다면, 강단 위에서 아무리 화려하고 정당한 교리적 선언을 쏟아낸다 할지라도 세상에 아무런 영향력도 주지 못하는 영적 실명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진정한 회개는 자신이 저지른 과거의 과오를 단순히 도덕적으로 후회하거나 눈물 흘리는 감정적 자책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몸을 휘감고 있던 어둠의 추악한 행실들을 과감하게 찢어 발겨 벗어버리고, 찬란한 대낮의 햇빛 아래를 걷는 것처럼 단정하고 성결하게 걸어가기 시작하는 근본적인 존재론적 방향 전환이자 삶의 혁명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빛의 갑옷을 입자”는 사도의 수사는 대단히 수려하지만, 그 안에 내포된 영적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갑옷은 귀족들의 유희를 위한 화려한 장식품이나 연회용 의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피와 살이 튀는 처절한 전쟁의 현실을 필연적으로 전제하는 전투용 장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은 세상의 피곤한 갈등으로부터 저 멀리 도피하여 누리는 안락한 영적 웰빙이나 심리적 평온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탄의 권세가 지배하는 세상 한복판의 전장으로 걸어 들어가, 하나님의 양심과 진실성, 그리고 아가페의 사랑을 사수하기 위해 치열하게 피를 흘리기까지 싸워내는 거룩한 영적 긴장 상태입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여 위선적으로 연출해 내는 종교적 경건이 아니라, 그 누구도 나를 주목하지 않는 고독한 은밀한 자리에서조차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온 영혼을 투명하게 열어젖히는 정직함만이, 신자가 영적으로 깨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명확한 신앙적 표지입니다.
이러한 종말론적 깨어 있음은 인류의 종말 날짜를 억지스럽게 산정하며 일상의 삶을 파괴하는 광신적인 불안 증세가 아닙니다. 도리어 나에게 허락된 단 하루의 일상을 가장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게 만드는 소망의 원동력입니다. 역사의 완성의 날이 날마다 우리를 향해 가까이 도래하고 있다는 확고한 믿음은, 우리가 처한 역사적 현실을 가치 없고 하찮은 것으로 격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오늘 무심코 내뱉는 말 한마디, 순간적으로 내리는 도덕적 선택 하나하나를 영원의 저울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그 일상의 가치를 한층 더 무겁고 선명하게 주조해 냅니다. 다가올 미래의 영광스러운 빛을 미리 맛보며 대망하는 사람은,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 어둠의 세력과 구차하게 타협해야 할 하등의 이유와 명분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5. 그리스도의 의(義)로 호흡하는 공적 성화의 성막
로마서 13장의 거대한 대단원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종말론적 대선언으로 온전히 수렴되며 마침표를 찍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가 세상의 국가 권세와 양심의 문제, 사랑의 대계명과 율법의 성취, 그리고 종말론적 깨어 있음과 도덕적 성결이라는 거대한 신학적 봉우리들을 차례로 등반한 끝에 마침내 당도하게 되는 영광스러운 종착지 역시 바로 이 자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언어나 세련된 기독교적 교양을 자신의 외면에 그럴듯하게 걸치고 위장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완성된 그리스도의 온전한 의(Righteousness)가 죄로 얼룩진 우리 존재 전체를 완전히 덮어 은폐하는 칭의의 사건이며, 그 부여된 의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의 삶이 날마다 거룩하게 변모해 나가는 역동적인 성화(Sanctification)의 노정입니다.
장재형 목사가 로마서 13장의 전체 맥락을 관통하며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복음의 진정한 깊이는 바로 이 최종적인 그리스도 중심성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교회와 성도는 국가 권력의 거대한 위협 앞에서도, 도움을 요청하는 이웃의 절박한 필요 앞에서도, 그리고 종말과 함께 밝아오는 영원한 낮의 찬란한 빛 앞에서도, 인간 스스로의 도덕적 결단이나 종교적 고행의 방식으로는 결코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는 철저히 무력한 존재들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에만, 우리를 옥죄던 종교적 의무와 계명들은 비로소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기쁨의 자발적인 순종으로 승화됩니다. 또한 복음 안에서의 진정한 회개는 자학적인 자기혐오나 절망의 늪으로 침잠하지 않고,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소망을 향해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는 영광스러운 귀환으로 완성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천국 윤리는 저 멀리 천상에 존재하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주의적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한 그리스도인이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과감하게 벗어 던져야 할 옛 사람의 낡은 옷과, 성령 안에서 새롭게 부여받아 입어야 할 새 사람의 옷 사이의 치열한 선택의 자리에서 매일 새롭게 시작되는 현실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옷은 세상 속에서 우리 자신을 안전하게 감추고 은둔하기 위한 보호색의 옷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우주 안에서 과연 누구에게 속해 있으며, 누구의 소유인지를 세상 모든 권세와 영혼들 앞에 가장 선명하고 대담하게 증명해 보이는 영광스러운 공적 제복입니다. 세상의 권세 앞에서는 비굴하지 않은 당당한 신앙의 양심으로, 굶주리고 헐벗은 이웃 앞에서는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내면의 은밀한 죄악 앞에서는 뼈를 깎는 철저한 회개로,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의 위협 앞에서는 흔들리지 않는 종말론적 소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삶,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의 실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성경의 선언은 결코 개인의 골방에서 행해지는 사사로운 경건의 문장으로 그 생명력을 다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이 왜곡된 역사 속에서 어떠한 거룩한 안면을 하고 서 있어야 하는지, 어떠한 십자가의 방식으로 세상의 거대한 악의 구조를 격파해 나갈 것인지, 그리고 어떠한 희생적인 사랑을 통하여 자기 안에 살아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공적으로 증언할 것인가에 대한 엄숙하고도 우주적인 신앙의 공적 고백입니다.
결국 이 장엄한 말씀의 흐름은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의 우리들을 향해 조용히 멈추어 설 것을 명령합니다. 나는 지금 세상 권력의 화려함과 횡포 앞에서 비겁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침묵하거나, 반대로 통제되지 않는 인간적인 분노에 휩싸여 세상의 악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입술로는 날마다 은혜에 빚진 자라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내 가장 가까이에 서 있는 지극히 작은 이웃을 향해 악을 행하지 않는 최소한의 도덕적 절제마저 상실한 채 탐욕을 부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구원의 낮이 이 세대의 밤보다 훨씬 가까이 도래했다고 소리 높여 찬양하면서도, 정작 내 삶의 은밀한 안방에서는 여전히 어둠의 편안하고 안락한 옛 습관의 옷을 걸치고 잠들어 있지는 않습니까. 기독교의 복음은 오늘도 세상의 요란하고 거창한 종교적 확성기 소리보다, 그리스도의 의로 깊게 채워진 성도의 묵직한 옷차림과 거룩한 삶의 발자취를 요구합니다. 우리가 지금 차려입고 있는 삶의 양식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인지, 아니면 오래도록 길들여진 해묵은 정욕의 습관인지를 준엄하게 묻는 그 복음의 칼날 같은 질문 앞에서, 우리의 잠든 신앙은 다시 한번 거룩한 전율과 함께 깨어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