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Ⅰ. 영혼이 잘됨: 우리의 중심이 되는 신앙과 영적 기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한삼서 1장 2절)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는 이 구절은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 기도제목이자, 한 해를 여는 문턱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사도 요한이 간구한다는 표현을 썼는데, 간구는 곧 기도입니다. 요한은 두 가지를 기도합니다. 하나는 ‘네 영혼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둘은 별개가 아니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네 영혼이 잘됨 같이”라는 문구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즉, 영혼이 잘 되어 있어야 삶의 모든 영역에서도 진정한 강건함과 번영이 일어난다는 원리입니다.

바울 사도의 인간론을 살펴보면, 인간이 단순히 육체로만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라 ‘겉사람’과 ‘속사람’으로 구성된 이중적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겉사람은 우리의 육체적·물질적 부분을 말하고, 속사람은 영적·내면적 부분을 의미합니다. 장재형목사 역시 이러한 본문을 자주 인용하며, 신앙생활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속사람’을 바로 세우는 데 있다고 강조하곤 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쇠약해지고 늙어가지만, 우리의 속사람, 곧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고린도후서 5장 1~4절을 통해 ‘장막 이론’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땅의 장막은 우리의 육신을 의미하며, 언젠가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음이 단순히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낡은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는 과정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죽음을 단순히 무로 돌아가는 현상으로 보지 않고, 낡은 옷을 벗고 ‘새롭게 덧입음’을 경험하는 과정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분명히 인간에게는 속사람(영혼)이 있으며, 그것이 진정한 정체성이고 그 영혼은 영원성을 지닌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장재형목사는 “참된 신앙은 영혼의 문제 해결에서 시작되며, 진리를 좇는 영혼의 갈망이야말로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핵심”이라는 취지로 여러 설교와 저술에서 피력해 왔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삼서 1장 2절에서도 사도 요한은 같은 맥락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혼이 가장 중요한 기초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가정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관계에 문제가 생길 때, 단순히 육체적·물질적 문제, 경제적 문제만 해결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근본적으로 풀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근본 해결은 언제나 ‘영혼의 문제’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인간의 영혼은 영원한 것이며, 그 영혼이 흔들리고 병들면, 외적인 문제가 아무리 해결되어도 삶 속에 평안과 안정이 깃들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한 해를 시작하면서, 그리고 평생을 살아가면서 먼저 점검해야 할 부분은 ‘내 영혼이 과연 건강한가? 하나님과의 관계는 올바른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러한 영혼의 문제는 성경이 꾸준히 강조하는 주제이며, 바울과 요한만이 아니라 구약의 여러 시편 기자들도 동일하게 노래합니다. 예컨대 시편 42편 1절에서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라고 노래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영혼이 진리를 갈망하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본질적 욕구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물질적인 만족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근원적인 목마름이 있다는 것입니다. 장재형목사 역시 이 부분에 대해 “인간은 영적 존재이므로, 영혼의 갈증은 하나님 안에서만 해결된다. 세상의 쾌락, 향락, 물질적 풍요가 한 순간 우리를 즐겁게 할지라도, 영혼의 깊은 만족은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랑 안에서만 완성된다”고 여러 설교에서 강조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문제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언급했던 것은, 고린도라는 도시가 당대에 매우 향락적이고 물질지향적인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고, 눈앞의 유익을 위해 살며, ‘오늘 먹고 마시자. 내일은 죽으리라’는 식의 사고방식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삶의 태도가 결국 인간 존재를 병들게 하고, 진정한 삶의 목적과 소명을 잃어버리게 만든다고 경고했습니다. 그 뿌리는 영혼의 문제이며, 속사람이 깨어 있지 않으면, 겉사람이 아무리 부유하고 건강해 보여도 결국 인생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로마서 5장 10절 말씀을 인용해 보면,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하여, 우리 인간이 죄 가운데 있을 때, 곧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이 되셨음을 선언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8절 이하에서, 인간이 진리를 외면하고 탐욕적 욕망에 빠져 살아갈 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유물론자들은“육체가 전부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다. 죽으면 그만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고 성경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영적 존재이기에, 진리와 사랑, 의와 거룩을 향한 갈망이 있다. 그 갈망이 무시되면, 결국 인간 내면에는 극도의 공허와 하나님의 심판이 뒤따른다”라고 가르칩니다.

장재형목사 역시 로마서 강해를 통해 여러 차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구원의 길이 열렸다. 이것이 복음의 은혜요,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입술로만 고백하고, 실제 마음으로 믿지 못한다면 아직 구원의 실체를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역설했습니다. 실제로 로마서 10장 10절에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음에서부터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은혜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때, 인간의 영혼이 새롭게 태어나는 중생이 일어납니다. 이를 경험하고 나면, 그 기쁨과 감격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에 자연스럽게 선교와 전도를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평생토록 붙들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내 영혼이 과연 잘되어 있는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가리켜 “신앙의 첫 단추”라고 표현합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나머지 단추들도 줄줄이 어긋나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 전체가 흔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 즉 영혼과의 문제가 바로 서면, 삶의 다른 모든 부분도 점차 제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한다”는 사도 요한의 간구가 곧 우리의 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나 가정에서, 혹은 일터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문제들—사람 간의 불화, 재정적 어려움, 건강 문제, 진로 문제 등—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대개 영적인 토대가 무너져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이런 분석을“지나치게 종교적”이라고 치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가장 근본된 문제는 영혼의 문제”라고 선언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건강하게 살아 있고,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질 때, 겉사람(육체)도 견고하게 서며, 주변 관계와 환경에도 하나님의 질서와 평강이 임합니다.

우리는 ‘영혼의 번영, 영혼의 회복’을 최우선 순위로 삼아야 합니다. 교회들이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예배와 선교, 교육, 봉사, 미디어 사역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계획을 수립하든, 그 중심에는 반드시 “내 영혼은 과연 건강한가? 나는 진정으로 하나님과 직면(face to face)하여 서 있는가?”라는 질문이 놓여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는 첫 번째 핵심, 그리고 바울이 줄곧 외쳐온 인간론적 기초입니다.

많은 지도자들이 교회를 세우고, 건물이나 센터를 확장하며, 성도 수를 늘리는 계획을 세울 때가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은 때때로 물리적인 확장도 포함됩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모든 활동과 사역의 밑바탕에는 영혼의 성장, 내면의 성숙, 신앙의 성숙이 반드시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장재형목사는 “건물은 언젠가 낡아질 수 있고, 조직은 변할 수 있으나, 한 사람의 영혼이 새로워지는 일은 영원한 가치를 지닌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결국 영혼과 영혼이 연결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새롭게 태어나 함께 예배하고 섬기는 관계 속에서 완성된다”고 자주 설파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올해는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교회가 부흥할 것이다. 재정적으로 풍성해질 것이다”라고 선언해도, 영혼의 문제를 방치한다면 모든 것이 모래 위에 쌓은 집처럼 무너질 위험이 큽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이 말하는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바란다는 기도는, 철저히 영혼이 건강해야 나머지도 건강해진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소주제, 곧 “영혼이 잘됨: 우리의 중심이 되는 신앙과 영적 기초”에 대한 성경적·신학적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메시지는 장재형목사뿐 아니라, 교회사 전반에 걸쳐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꾸준히 강조해온 핵심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영혼이 건강하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열심이나 행사 참여의 빈도로만 평가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을 열심히 하더라도, 속사람이 점점 메말라 갈 수 있습니다. 반면 겉으로는 교회 활동에 많이 참여하지 못하는 상황이지만, 내면으로는 말씀과 기도로 깊어지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더해가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혼이 진리와 사랑 위에 굳게 서 있고,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 동반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혼이 살아 있고 ‘잘됨’을 가늠하는 진정한 기준입니다.

인생 어느 시점에서든지, 우리는 먼저 “하나님, 제 영혼이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죄책감이나 미움, 씀씀함, 상처, 혹은 무기력 가운데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바라보고 있습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조명하심을 구하며,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로부터 오는 평안을 다시금 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영혼이 잘됨의 첫 걸음입니다.

Ⅱ.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지는 삶

요한삼서 1장 2절에서 사도 요한은 “네 영혼이 잘됨 같이”라는 전제를 놓고, 이어서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고 기도합니다. 이는 영혼이 먼저 건강해야, 그에 따라 우리의 삶 전반이 덕을 보고 건강해질 수 있다는 성경적 원리입니다. 신앙생활을 통해 우리는 이 원리가 결코 단순한 ‘덕담’이나 ‘추상적 소망’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역사하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만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범사에 잘된다’는 표현이 단순히 세속적 성공과 물질적 풍요를 보장한다는 번영신학적 가르침과 동일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범사에 잘된다”는 개념을 훨씬 더 깊은 차원으로 이해하도록 가르칩니다. 참된 번영은 영혼이 먼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서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우리 삶 곳곳에 동행하심으로써‘하나님의 평강과 질서, 축복’이 임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것은 돈이 많든 적든, 높은 지위에 오르든 못 오르든과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아닙니다. 진정한 번영과 성공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마 6:33)”, 그 안에서 만족을 누릴 때 따라오는 결과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궁핍에도 처할 줄 알고, 풍부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빌 4:12)”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범사가 잘되는 진정한 의미가 곧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어디서든 감사와 기쁨을 누리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장재형목사 역시 여러 설교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그가 어떤 상황에 놓이든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발견하고 주님을 찬양하며, 때로는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기쁨을 갖게 된다. 그것이 범사에 잘되는 삶의 핵심”이라고 강조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 난관이나 고통이 찾아올 때, 세상적인 잣대로 보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느낄 수 있지만, 영적으로는 오히려 그 시기에 영혼이 더 정결해지고 성숙해지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잘되고 강건해진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성공’의 크기만을 말하지 않으며, 오히려 영혼이 하나님 안에 든든히 뿌리를 내렸기에, 어떤 풍파나 어려움에도 요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해 내는 능력을 소유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강건하다”는 표현에서 우리는 ‘육체의 건강’뿐 아니라 ‘내면의 든든함’까지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강건함은 단순히 병에 걸리지 않는 신체적 상태를 넘어, 영혼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담대해지고, 세상 유혹과 사단의 공격에도 굴하지 않는 믿음의 견고함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엘리야나 다니엘, 혹은 바울 사도의 삶을 돌아보면, 그들은 결코 평탄한 인생만을 살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핍박, 위험,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하나님께 매여 있었기에, 그들은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고 승리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외적으로 “모든 게 탄탄대로”였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영혼이 든든했기에 범사가 영적인 의미에서 잘되고 강건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번영이자 강건함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서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라고 외친 것은, 복음 전파가 그만큼 영혼을 살리는 사명이자, 동시에 자신에게도 생명과 같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진정으로 ‘잘됨’을 경험한 사람, 즉 십자가의 은혜와 복음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은, 그 감격으로 인해 전도를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어디에서나, 복음의 능력을 맛본 이들은 곧바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며, 다른 영혼들을 돌보고 이끄는 일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모든 다양한 전도 방식의 핵심은 결국 “영혼 구원”에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자주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영혼 구원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복음 전파야말로 교회가 존재하는 궁극적 이유이며, 우리가 이 땅에 숨 쉬고 살아가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라고 말씀하셨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도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정말 하나님께 붙들려 살아 있고, 그 구원의 감격을 생생하게 누리고 있다면, 이 사명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어떤 특별한 프로그램이나 준비가 없어도, 복음을 깨닫고 마음에 불이 붙은 자는 곧장 “내가 겪은 주님의 은혜, 내가 깨달은 구원의 축복”을 전하려 하기 마련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가 “성경구절이 많이 들어갈수록 좋은 설교”라고 말했듯, 복음은 우리의 논리나 수사학으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가진 권위와 능력을 통해 전달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성경을 열심히 읽고, 말씀을 이해하며,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고 설교나 간증을 통해 전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끊임없이 함께 말씀을 읽고 나누며,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할 때, 그 영혼들이 점차 살아나고 하나님의 뜻에 눈을 뜨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알곡과 가라지 비유(마태복음 13장)’를 떠올려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심판 때에는 알곡(구원을 받아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자)과 가라지(심판을 받을 자)가 명백히 갈라지게 될 것임을 경고했습니다. 지금 당장은 교회 안에 함께 뒤섞여 있을지라도, 심판대에서 결실을 맺는 시점이 되면 그 구분이 분명해진다는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적용하여 “전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영혼이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여 구원에 이르게 하느냐, 아니면 거절하느냐의 문제다. 이 생사와 구원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복음을 전할 책임이 있고, 복음을 전해 들은 영혼은 응답할 책임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전도자의 입장에서는 알곡이 될 영혼을 찾기 위해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듣는 이는 그 말씀을 받아들여 스스로의 영혼을 살릴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서로를 격려하며 “전도에 박차를 가합시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 것입니다. 많은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고 교회에 올 것입니다”라고 선포하는 것은 신앙의 본질적 사명과 맞닿아 있습니다. 아울러 그것은 단순히 “우리 교회를 크게 만들자”는 목적이 아니라, “잃어버린 영혼이 구원받도록 하자”는 하나님의 마음과 사명이 담긴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그 일에 기꺼이 동참하시고 함께 역사를 이루십니다. 교회의 성장 역시 그 열매 중 하나가 될 수 있지만, 본질은 사람 숫자보다 ‘구원받은 영혼의 생명’에 있습니다.

이처럼 전도에 힘쓰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내 영혼은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는가?” 하는 근본적 질문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영혼이 건강해야 범사에 잘되는 은혜를 누립니다. 만약 영혼이 병들어 있다면, 세상 일로 분주하게 뛰어다니더라도 결국 허무와 상실감을 느끼게 됩니다. 교회 사역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기쁨이 없고, 사람들 사이에 갈등만 깊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살아 있고, 말씀이 내 안에 충만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면, 환경이 조금씩 힘들어도 내면에 성령의 열매들이 맺히며(갈 5:22~23), 주변 사람들과 관계에서도 놀라운 은혜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길 바란다”는 기도의 실제적인 성취입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항상 ‘첫 단추’를 바로 끼우는 일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순위에 두고, 영혼의 건강을 챙기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바른 관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과 사명을 따라 세상 가운데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교회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동시에 열정적으로 세상에 파송되어 복음의 증인이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지상명령(마 28:19~20)이며,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하신 주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다양한 형태의 ‘거대한 미션 플랜’을 완성해 가고, 여러 가지 변화를 꿈꿀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실질적으로 필요한 재정, 인력, 장소, 프로그램 등도 잘 마련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플랜과 변화가 “영혼이 잘됨”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지, 또 “구원받은 영혼이 더욱 성숙해지고, 아직 복음을 모르는 영혼이 교회로 인도되는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는지 끊임없이 점검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사역의 규모가 커질수록 더 철저히 영혼의 본질, 말씀 중심의 신앙, 그리고 거룩한 삶의 실천을 챙겨야 한다”고 누차 말해왔습니다. 그 이유는, 규모가 커질수록 자칫 외형적 성장에만 매달리고, 정작 영혼 구원과 제자 양육이라는 본질을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3장 19절을 보면,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 시대, 새 구원을 열어주실 것을 예언하시는 장면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교회와 개인의 비전에 대입해 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도 “새 일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영혼이 그 새 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나님께서 움직이실 때 순종하여 일어설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영혼이 부재하고, 말씀의 능력을 잃어버린 상태라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부흥과 은혜를 부어주셔도 그것을 온전히 받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의 이 기도를 마음에 새기며, 장재형목사가 자주 강조해 왔던 것처럼 영혼의 문제를 다시 돌아봐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것은 덕담이나 형식적 인사가 아니라, 영혼과 삶을 위한 가장 본질적이고 실제적인 기도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열려 있고, 날마다 회개와 말씀으로 정결케 되며, 성령의 충만함으로 강화될 때, 그 결과로 삶의 여러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와 보호하심, 그리고 번영과 강건함이 뒤따라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이 은혜를 경험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교회가 다시금 회복과 부흥을 경험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나와 교회의 영혼 상태부터 점검해야 합니다. 영혼이 먼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설 때, 교회의 비전도, 개인의 계획도, 가족의 문제도, 직장의 고민도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해결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이 과정을 건너뛸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말씀, 그리고 장재형목사를 비롯한 여러 영적 지도자들이 계속해서 외쳐온 ‘영혼 구원’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야말로, 한 해와 인생 전체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초석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마다 다양한 전도집회와 미션아웃리치, 성경공부반, 봉사 프로그램 등이 진행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무수히 많은 영혼이 교회로 모여들고, 복음을 전해 듣고, 하나님을 만나 삶이 변화되는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 앞서, 우리의 영혼이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충만하며, 성령 안에서 하나 되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삶, 그리고 열매 맺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체로 비유하자면 ‘영혼’이라는 척추가 반듯하게 서 있어야 몸 전체가 올바른 자세를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척추가 휘어지거나 약하면, 아무리 팔과 다리가 멀쩡해 보여도 결국 온몸이 고통을 겪습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이 건강한 상태’라는 영적 척추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교회와 개인의 삶이 기쁨과 힘을 발하며 올바른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를 붙들고 2022년을 시작한다면, 우리 각자와 교회 모두가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해지는” 복을 풍성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곱씹으며,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드리고, 주님과의 친밀함 가운데 거합시다. 이것이 바로 사도 요한의 기도가 우리에게 주는 핵심적인 권면이며, 수많은 목회자가 거듭해 우리에게 강조하는 바입니다. 영혼이 살아 있고, 말씀으로 충만해진다면, 우리는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삶을 자연스럽게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리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붙들며, 매일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릴 수 있는 2022년,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날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한삼서 1장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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