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의 심장부, 지표면 아래 깊숙이 자리한 지하 감옥은 희망이라는 단어가 완전히 증발해버린 무덤과도 같은 공간이었습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눅눅한 습기와 손목과 발목을 옥죄는 무거운 쇠사슬은, 자유를 박탈당한 인간의 비참함을 매 순간 일깨워주는 고통의 표상이었습니다. 세상의 보편적인 이치와 상식으로 판단한다면, 사도 바울이 평생을 바쳐온 복음 선교의 대장정은 여기서 ‘강제적 마침표’를 찍어야 마땅했습니다. 전도자의 발이 묶였으니, 그가 전하던 생명의 소식 역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소멸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론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차갑고 딱딱한 돌벽 사이에서 흘러나온 것은 절망의 비명이 아닌 뜨거운 찬송이었으며, 비탄의 눈물이 아닌 시대를 초월한 ‘기쁨의 서신’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상황이 순조롭게 열리고 모든 여건이 구비되어야만 복음이 전파될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빌립보서 1장은 이러한 우리의 얄팍한 고정관념을 정면으로 산산조각 냅니다. 바울은 자신을 묶고 있는 감옥이라는 ‘결박’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prokope)’**를 가져오는 촉매제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진보’라는 단어는 군대가 거친 장애물을 개척하며 전진할 때 사용하는 군사 용어입니다.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는 이 대목에 주목하여 **“복음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폭발적인 능력이기에, 인간이 고안해낸 물리적 장벽이나 환경적 악조건이 말씀의 생명력을 결코 가둘 수 없다”**는 신학적 혜안을 제시합니다. 바울을 가둔 로마의 쇠사슬은 복음을 전파하는 데 방해물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복음이 로마 황제의 시위대라는 핵심부로 침투하게 만드는 영적 도관(導管)이 되었고, 그의 강제된 침묵은 잠자던 성도들의 영혼을 깨우는 천둥 같은 외침이 되었습니다.
🏛️ 베드포드의 몽상가와 로마의 사도: 멈춤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전진
이 역설적이고도 장엄한 장면은 17세기 영국의 탁월한 설교자 **존 번연(John Bunyan)**의 생애와도 깊이 공명합니다. 번연은 국왕의 허락 없이 설교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베드포드 감옥에 무려 12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수감되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의 불타오르던 사역은 실패한 것처럼 보였고, 그의 힘 있는 목소리는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좁고 어두운 감옥 안에서 기독교 문학의 최고봉인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을 잉태하게 하셨습니다. 만약 그가 감옥 밖에서 자유롭게 설교했다면 당대의 수천 명에게 영향을 주었겠지만, 감옥 안에서의 고독한 고뇌와 집필은 수 세기 동안 수억 명의 영혼을 천성으로 인도하는 영원한 나침반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로마 감옥 역시 이와 같은 섭리의 현장이었습니다. 바울의 육신은 비록 쇠사슬에 묶여 있었으나, 그가 떨리는 손으로 써 내려간 ‘옥중서신’은 시공간의 제약을 완전히 초월하여 오늘날 우리들의 손에까지 전달되었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명처럼, 이것은 인간의 좁은 계산법을 비웃는 하나님의 신비롭고도 거대한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사역자의 사역을 ‘멈춤’으로써 더 거대한 ‘전진’을 기획하십니다. 우리의 유한한 눈에는 실패와 단절로 비치는 그 순간이, 하나님의 무한한 눈에는 복음이 더 깊고 넓게 확장되는 결정적인 기회의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주한 작금의 환경적 제약은 복음이 묻히는 무덤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일하시는 새로운 차원의 무대임을 우리는 영적으로 자각해야 합니다.
🌊 불순한 동기마저 정화하는 거대한 은혜의 해류
그러나 바울을 진정으로 괴롭혔던 것은 차가운 육체의 구속보다 더 아픈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감옥 밖, 믿음의 형제라고 불리던 이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날 선 잡음이었습니다. 일부 전도자들은 바울의 부재를 기회로 삼아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고 파벌을 형성하려는 불순한 동기, 즉 투기와 분쟁의 마음으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바울의 심리적 고통을 가중시키려는 악의적인 의도까지 품고 있었습니다. 가장 거룩하고 순결해야 할 복음 사역의 현장 한복판에 인간의 저열한 시기심과 추악한 정치적 야망이 독소처럼 스며든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장재형 목사는 현대 교회의 아픈 환부를 찌르는 통찰을 던집니다. **“초대교회조차 우리가 꿈꾸는 완전한 천국이 아니었으며,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내면 깊은 곳에도 여전히 정제되지 않은 인간적 욕망과 죄성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엄중한 사실입니다. 바울이 겪었던 이 내우외환(內憂外患)은 오늘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갈등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만약 보통의 사람이라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상대를 정죄하며 비난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모든 인간적 감정을 초월하는 영적인 고백을 내놓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이것은 단순한 긍정적 사고가 아닙니다. 이는 자신의 자존심이나 명예보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는 것’을 삶의 절대 가치로 삼는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영적 거장의 풍모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인간의 불순한 의도조차 선용하여 구원의 역사를 완벽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철저한 신뢰”**라고 해석합니다. 비록 인간의 동기에 흙탕물이 섞여 있을지라도, 그 물길을 결국 정화하여 생명의 바다로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바울은 확신했던 것입니다.
🕊️ “그게 무슨 상관이냐?” — 본질을 향한 거룩한 질문
바울이 던진 **“그게 무슨 상관이냐?”**라는 반문은, 오늘날 사소한 시시비비와 감정 소모에 매몰되어 복음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우리는 종종 메신저의 태도나 인격적 결함을 문제 삼느라 정작 메시지가 확장되는 것을 스스로 가로막곤 합니다. ‘저 사람의 의도는 불순해’, ‘저 방식은 내 취향과 맞지 않아’라며 비판의 날을 세우는 동안, 우리 삶의 대명제인 복음 전파는 늘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장재형 목사의 강해를 통해 우리가 붙들어야 할 교훈은 매우 명확하고도 강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함을 재료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부족함과 심지어는 모순된 악함 사이에서도 당신의 선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괴롭히는 자들과 싸우는 대신, 그들의 입술을 통해서라도 전파되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음 중심적 삶’**의 정수입니다. 나를 죽여 그리스도를 살리는 것, 내 감정이 상처받는 것보다 복음이 한 걸음 더 전진하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도달해야 할 영적 지표입니다.
결론적으로 복음은 그 어떤 결박에도 매이지 않는 무한한 자유를 가집니다. 차가운 지하 감옥의 쇠사슬도, 사람들의 뜨거운 시기심과 질투도 생명의 말씀이 질주하는 것을 막아설 수 없었습니다. 장재형 목사가 거듭 강조한 대로, 복음은 상황의 우호적임과 척박함을 초월하여 스스로 길을 내는 강력한 생명력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지금 당신의 삶이 마치 감옥처럼 답답하게 느껴지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칼날처럼 아프게 느껴집니까? 절대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지금 그 모든 모순과 결핍, 그리고 아픔을 소중한 재료 삼아, 당신의 생애를 통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구원의 드라마를 써 내려가고 계십니다. 상황은 변하고 환경은 흔들려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완벽한 섭리는 영원히 유효합니다.